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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Feb 09. 2023

미술관 가는 길

그림 같은 집, 그림 속의 집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를 열창하던 세대는 아니지만, 어떤 집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에 막연하게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싶어요…”라고 얼버무리게 된다. 나도 모르게 꿈꿔왔던 그림 같은 집은 어떤 집일지 한번 상상해 볼까.

 멀끔한 갤러리처럼 보이는 미니멀한 건물 앞쪽에는 노란 다이빙대에서 누군가 막 뛰어들었는지 물보라가 일어나는 수영장이 있다. 그리고 늘씬하게 키 큰 야자수 그늘아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집, 그런 집이라면 어떨까.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A Bigger Splash 더 큰 첨벙>의 집은 빈 의자와 화면상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 덕분에 느긋하게 이어폰을 꽂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확신이 든다. 경쾌한 색감에서 오는 밝은 에너지가 더해져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드는 이런 집이라면 우리가 꿈꾸는 그림 같은 집에 얼추 들어맞아 보인다.

 영국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호크니는 집집마다 수영장이 있는 모습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아 수영장 시리즈를 그렸다고 한다. 우중충한 영국의 기후와 달리 청명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그리고 그 날씨에 꼭 필요한 수영장. 어쩌면 그도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우리 집에 있는 <더 큰 첨벙> 포스터를 찬찬히 보니 호크니의 숨겨진 염원이 보이는 것 같다.

 작가 알피 케인은 공간 전문 작가로 불려도 될 만큼 건축이나 인테리어적인 요소들을 가득 품은 그림을 그린다. 실제로 건축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럴 줄 알았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의 그림들을 유심히 바라보면, 고요한 순간이 엄습해 온다. 풍부한 색감이 돋보이는 점에서 같은 영국 출신인 호크니를 연상케 하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은 좀 더 내밀한 느낌이다. 줄무늬 패턴의 벽지 앞 의자에 기댄 기타 뒤로 잔잔하게 펼쳐지는 호수와 산의 풍경이라든지, 반려견을 쓰다듬으며 휴대폰을 보며 누워있는 남자의 시간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노을빛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진정시킨다. 건축학도 출신답게 집안의 오브제들을 디테일하게 표현했지만, 그런 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을 둘러싼 풍경들이다. 외부의 전망까지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 또 다른 세상과 분위기로 확장되는 느낌. 집을 둘러싼 환경까지도 집의 일부인 셈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사람들이 제 작품의 공간에서 실제 거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길 원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들은 초현실적으로 무형이며 이상화된 세계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리는 이 공간들이 잠시나마 현실을 대신하며 일상으로부터의 정신적 탈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집은 단순히 잠을 자고 식사를 해결하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안내하는 세상이다.

  그림 같은 집에 살면서 그림 같은 풍경을 끊임없이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 클로드 모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저택과 부지를 매입해 본격적으로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와 수선화, 튤립, 라일락, 장미, 모란 등 다양한 꽃들로 구성된 꽃의 정원을 위해서 그는 전문 정원사를 고용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한 폭의 캔버스로 생각하고 마치 구도를 잡듯이 꽃들을 배치했는데, 그의 그림처럼 뚜렷한 윤곽을 지니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움이 물씬 느껴지게 연출했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았는데도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정원은 뛰어난 감각의 모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타고난 감각만으로 가능했겠는가. 작은 테라스를 관리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그가 정원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을지가 보였다. 그는 왜 그렇게 정원에 꽂혔을까.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싶은 본능은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싶은 욕망과 연결돼 있다. 그는 자신의 정원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작품에 담아내고, 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기 위해 정원을 가꾸는데 더 집착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꽃의 정원을 지나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만나는 일본식 아치형 다리와 수련 연못은 모네 그림이 환생한 것 같은 풍경이다. 모네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수련 연못의 모습을 250여 점 가까이 반복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청초한 수련들과 연못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 그리고 연못 위에 비친 구름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물의 요정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모네는 캔버스에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리고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마법에 걸린 듯 도취된다.

 모네의 집처럼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작가의 집이 있다면, 집과 함께 직접 찾아오는 작가도 있다. 서도호 작가는 자신이 거주했던 공간의 구석구석의 수치를 꼼꼼히 측정해 정교하게 천으로 떠내는 작업으로, 차곡차곡 접어서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이동 가능한 집을 표현한다.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서도호 작가의 전시였다. 이 전시는 그가 유학시절 처음 거주했던 로드아일랜드의 3층 주택을 밝은 청색의 천으로 재현하고 건물의 중심엔 한국에서 작가가 살았던 한옥집을 품은 형태로 나타난다. 집이 집을 품고 있는 구조는 개인의 역사가 그동안 살아왔던 집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상징한다. 과거에 살았던 공간이 현재의 공간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고, 다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지난 시간들을 계속 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온 집은 우리의 역사이고 기록이지 않을까. 나의 정체성, 취향, 라이프 스타일을 모두 담은, 나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존재가 집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집을 재산이나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게 1순위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이 자본주의 마인드가 자리 잡을 초기에 약간의 저항은 있었다. 신문을 보고 있는 남편과 피아노 앞에 앉은 아내. 건반만 누를 뿐 연주를 하는 것은 아닌 아내는 남편에게 마음속의 이야기를 건네지 못하는 눈치이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신문 기사에만 집중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1930년대에 그린 <뉴욕의 방> 속 부부는 한 공간에 같이 있어도 서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사는 도시의 삶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브루클린의 방>에서 호퍼는 바깥을 내다보며 혼자 앉아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다. 맞은편 건물들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우아한 집에 살고 있는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화사한 꽃으로 집안의 생기를 끌어올려 보지만, 짙게 깔린 쓸쓸함을 채워 넣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집안에 들어온 한줄기 빛도 그녀를 구원해주지 못할 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치고 힘들 때마다 집을 떠올리며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 모두로부터 도망쳐 숨고 싶을 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내밀한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을 때, 우리는 주저 없이 나만의 공간으로 향한다. 이런 거창한 이유가 없어도 매일같이 돌아갈 집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뜨끈하고 편안하다. 집으로 가니까, 마침내.

 고단한 현실에 떠밀려 멋진 집에서 살겠다는 그 꿈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오늘도 그림 속의 집을 지그시 바라본다. 집은 내 삶의 원동력이자 영원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여성조선 2023년 1월호에 실린 아트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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