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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Oct 28. 2022

라떼 발레는 말이야

동그란 얼굴에 전형적인 한국형 아줌마 파마머리를 고수했던 중학교 시절 무용 선생님은 풍채가 좋은 분이었다. 무용 동작보다 주로 입담으로 여중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첫사랑, 가정사,  이야기 등으로 수업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1시간의 수업 시간은  짧고 아쉬웠다. 아이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해 다음  수업에도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얘들아, 우리, 오늘은 무용을 좀 배워봐야 하지 않겠니?”

“ 아앙~ 얘기 더 해주세요. 지난주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유머러스하고 말재주가 좋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게 퍽 재밌었다. 안경 너머로 호기심 가득한 우리를 바라보던 선생님은 못 이기는 척 지난주에 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마친 후 아이들의 성화를 뒤로 하고 몇 주 만에 무용 동작 시범을 보여주던 어느 날

      

“얘들아, 팔을 이렇게 길게 뻗어서 사뿐사뿐 옆으로 이동해 보는 거야.”

“우와~~”

“그렇게 보이진 않겠지만 나, 무용 선생님이야~”


키가 크고 묵직한 그녀의 몸이 공기를 가르고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선생님의 몸짓은 마술 같았다. 특히 나비의 날개처럼 훨훨 날개 짓을 하는 팔 동작이 인상 깊었다. 무용 시간이 있는 날마다 하교 후 방문을 닫고 거울을 보며 선생님의 팔 동작을 따라 해 보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무용이라는 과목을 처음 접하면서 동작의 우아함에 어렴풋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도 무용을 배웠다. 여중, 여고를 나온 덕에 3년 중 1학년 때마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무용을 배울 수 있었다. 고등학교 무용 선생님은 중학교 무용 선생님과 분위기가 많이 다른 분이었다. 누가 봐도 무용 선생님 같이 생긴 외모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주인공 마리아(쥴리 앤드류스)를 꼭 닮았는데 아무나 어울릴 수 없는 커트머리를 고급지게 소화해냈다. 남자 담임 선생님은 시간표를 보고 무용 수업이 있는 날이면

     

“무용하는 날이네. 무용 선생님 너무 미인이시지?”     


담임보다 10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 무용 선생님을 향해 공개적으로 외모 찬양을 했다. 커다란 눈망울, 서양인처럼 반듯하고 오뚝한 코를 가진 무용 선생님의 얼굴은 여백이 별로 없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은 또렷한 이목구비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학교 무용 선생님과 달리 학생들과 격의 없이 편하게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콧대가 워낙 높아  가만히 있어도 도도함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런 아우라로 무용 동작을 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무대를 장악하는 러시아 무용수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고등학교 때 덩치가 큰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몸이 반쪽으로 변한 모습이 눈에 띄었고 자세 또한 범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학원을 다니며 입시 무용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살이 빠진 건 둘째치고 걸음걸이, 물건을 건네줄 때의 팔 동작 등 모든 게 가녀리고 여성스럽게 변해 있었다. 몇 개월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모습이 꽤 충격적이었다. 저 아이가 저렇게 예뻤나. 그 아이를 보고 잠시 스치듯 생각했다. 나도 무용을 해보면 어떨까.

      

무용을 배우려면 무용 학원에 다녀야 하고 엄마한테 말을 꺼내야 할 텐데, 엄마와 난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엄마를 무서워했던 나는 솔직하게 감정을 얘기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또한 이미 우리 집에는 미술을 전공하는 큰언니가 있어 다른 딸들까지 굳이 예체능을 시켜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껏 알았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 아스라한 기억 저편 속에 있던 무용, 발레를 향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여러 가지 연유로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간 후 시간적 여유가 생겨 드디어 취미 발레를 시작했다.      


처음 레오타드를 사서 집에서 시착해본 날, 두 시간 정도 레오타드를 입고 있었다. 마치 백설공주 코스프레를 하고 하루 온종일 벗을 생각을 안 하는 미취학 어린 여자아이처럼 말이다. 발레 옷을 입어보는 것만으로 내 안의 내면 아이가 위로받은 느낌이다.


요즘은 취미 발레를 하며 주제 파악을 하고 있다. 발레를 전공할 만큼 유연하지 못한 나의 근육들을 바라보며 엄마한테 무용학원 보내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길 백번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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