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커피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죠. 커피 칸타타는 커피를 좋아하던 바흐가 만든 작품입니다. 1734년 라이프치히에서는 커피가 유행하고 있었고 커피 하우스에서 커피 칸타타를 연주했어요.”
라디오 DJ가 들려주는 바흐의 커피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중저음 목소리가 매력적인 DJ의 맛깔난 진행 덕에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늦가을, 클래식 그리고 커피. 생각만으로도 삼합의 조화가 기가 막히다.
풀르트와 바이올린 연주가 어우러진 경쾌한 듯 미묘하게 애잔한 선율이 귀를 파고든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아빠와 딸이 실랑이를 벌이는 스토리 또한 눈길을 끈다. 커피를 끊으라는 아빠와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한 커피를 끊을 수 없다는 딸. 그들의 대화에서 당시 시대 상황이 요즘 시대와도 묘하게 맞닿아있음을 엿볼 수 있다. 커피를 향한 바흐의 진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커피 칸타타를 감상하며 커피 원두의 깊은 맛을 상상해본다.
딸(여성 소프라노)이 절규하듯 “커피, 커피”를 외치는 부분에서 베리향의 산미가 돋보이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가 떠오른다. 예가체프의 부드러운 신맛과 아련한 맛으로 애가 타는 여성을 달래주고 싶다. 복합적인 풍미와 바디감이 풍부한 케냐 AA도 괜찮겠다. 타이르는 듯한 아빠(남성 베이스)는 하와이 코나 원두와 찰떡일 것 같다. 열대 기후와 태평양 바람이 깃든 코나 원두의 풍성한 향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기후와 토양에 따라 다채로운 맛과 향을 품은 원두처럼 커피 칸타타는 파트에 따라 색다른 감상 포인트가 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커피를 보관해둔 부엌 찬장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가 어디 있더라.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높고 높은 곳에 커피를 보관해 두었다. 까치발을 하고 근육을 늘려 팔을 길게 뻗어 커피를 꺼낸다. 잡았다, 요 녀석. 손안에 잡아든 건 예가체프도, 케냐 AA 원두도 아니다. 하와이 코나 원두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스턴트 믹스 커피, 초록색 봉투에 담긴 디카페인 믹스 커피다.
사실 난 커피를 잘 못 마신다. 클래식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지만 커피의 카페인이 나의 몸과 궁합이 맞지 않아서다. 나라별 커피를 거침없이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건 웃픈 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 간다.
아이와 키즈 카페에 다니던 시절, 적극적으로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커피를 마셔보긴 했지만 한두 모금 목만 축이는 정도였다. 육아에 지쳐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던 찰나 눈앞에 커피가 나타났다.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머핀을 주문했더니 아메리카노 한잔이 딸려 나온 거다. 그래, 커피 한번 제대로 즐겨보자.
머그잔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담겨진 아메리카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아가들 들으라고 틀어놓은 동요가 내 귀에 캔디처럼 들린다. 진한 커피 향이 코 끝을 타고 들어가 뇌로 정확하게 전달된 모양이다. 심오한 갈색빛이 한약 같기도 하지만 구수한 향에 취해 머그잔을 들었다. 한 모금 홀짝였다. 생각만큼 쌉싸래한 맛이 혀끝에 뭉근한 여운을 남긴다. 입안에 남은 쓰고 시고 단 원두 맛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살짝 빠른 속도로 몇 모금 더 홀짝였다. 빨리 걷기를 한 것처럼 심장박동수가 적당히 빨라진다. 혈액순환이 되나 보다.
한데 머그잔에 커피 양이 줄어들수록 속이 메슥거리고 등에서 진땀이 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아가를 많이 안아줘서 체력이 달려 그런가. 얼른 잔을 내려놓았다. 다른 날 다시 마셔봐야지.
다른 날도 아들은 블루베리 머핀을 시켰고 눈앞엔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이 놓여있다. 조심스레 잔을 입에 갔다 댔다. 한두 모금 정도 기분이 좋아지다 이내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난다. 지난번보다 조금 마셨는데 왜 이러지. 컨디션이 계속 안 좋은 건가. 키즈 카페를 다녀온 날 유독 잠을 뒤척이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를 하루 종일 보던 때라 등만 기대도 잠이 쏟아지던 시기였는데 키즈 카페만 다녀오면 새벽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처음엔 커피 때문인지 몰랐다. 걸쭉하게 우려낸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로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면서 알게 되었다. 그날도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다. 아, 이 모든 게 카페인 때문이었구나. 몸의 반응에 대해 눈치가 없었다. 여러 번 울렁거리고 반복적으로 진땀을 빼고 여러 날을 뒤척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몸이 카페인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카페인이 잘 받지도 않으면서 커피가 당기는 날이 있다. 을씨년스러운 날의 당 떨어진 오후, 짙은 초록색 봉투에 담긴 디카페인 믹스 커피를 뜯어 찻잔 속으로 부어 넣는다. 90도 정도로 끓인 맞춤하게 뜨거운 물을 찻잔 반 정도까지 붓는다. 티스푼으로 커피 물을 휘휘 젓고 미세한 거품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찻잔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고 날숨으로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식힌 후 꿀떡 소리가 날 때까지 홀짝거린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구수함이 부드럽게 입안을 감싼다.
머릿속은 어느새 독일 라이프치히의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있다. 다방 커피면 좀 어떤가. 내 몸과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다. 몇 번의 꿀떡거림으로 이내 찻잔은 비어있다. 입술에 남은 한 방울까지 혀를 날름거리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