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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Nov 22. 2022

그의 문장을 음미하며 라면을 끓였다

“으,, 아,,, 악, 아악”

“아이고, 아프세요?”

“으,, 네”

“그냥 다른 생각하세요. 요즘 드라마 뭐 보세요?”

“윽,,, 드, 드라마 안 봐요.”

“예능 재밌는 거 뭐 있어요?”

“아악,, 예, 에느응 안 봐요.”

“그럼 집에 있을 때 뭐하세요?”

“으윽,, 그을 써요.”

“와, 멋지시다. 전 요즘 하루키를 다시 읽어요.”

“으응? 하루키요?”

“예전엔 어려웠는데 나이가 드니 조금은 읽기 편해졌어요. 하루키가 나이 먹는 건지, 내가 먹는 건지. 허허. 요즘도 어렵긴 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간증을 듣는 순간 피부과 침대에 누워있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뻔했다. 나도 요즘 그렇게 느끼는 작가가 있거든요. 엉엉. 나만 그런  아니었다. 눈물바람날 정도로 고통스러운 레이저 시술이 하루키 덕분에 무사히 끝났다. 하루키 책을 읽는다는 의사 얼굴이 궁금해졌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공장형 피부과에 다니는 데다 얼굴  이상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 누가 누군지 좀처럼 분간이 가진 않았다. 안면인식 장애 증상을 가진 몹쓸 눈썰미도 한몫한다. 다음번에 “하루키 읽는 원장님에게 레이저 받고 싶어요라고 하면 어떨까 상상만 해본다.


김훈 작가님이 나에게는 하루키다. 오래전부터 그의 책을 읽어보려 여러 번 애를 썼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당시 한창 이슈가 되던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갔다.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펼쳐보지만 이내 살포시 내려놓기 일쑤였다. 대신 수준에 맞는 가벼운 책들로 허기를 달래며 살아왔다.       


최근 신작 <하얼빈>을 구매할 굳은 결심으로 서점에 갔다. <하얼빈>의 한 부분을 읽어주는 라디오 DJ 목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그의 문장을 이해할만한 연륜이 쌓였다고 자신했다. 이럴 땐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가는 모습이 꽤 괜찮다. 이해가 어려웠던 책을 시도하면서 인생을 알아가는 것 같아 혼자 으쓱거리기도 한다.      


그의 신작은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디 한번 볼까. 귀담아 들었던 그 부분이 어디 있더라. 어디 보자. 여기던가? 음,, 책장을 펼치면서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그의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값비싼 신상 명품 백 앞에서 머뭇머뭇거리듯 김훈 작가님의 신작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명품백의 가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쉬이 지갑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그의 책도 나에게는 그랬다.


서점에서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에세이로 시작해보자. 소설보다 에세이가 접근이 편하다. 몇 권의 에세이가 눈에 띈다. 그중 <라면을 끓이며>를 집어 들었다. 그의 문장력은 에세이에서도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나마 소재가 친근해서 잘 읽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 진다. 인이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예상대로 라면에 대한 철학이 남다르다. 다행히도 나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아 라면 끓여먹을 생각이 나진 않았다. 그저 그의 문장만 곱씹으며 음미할 뿐이다.       


“도입부가 좀 길어졌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내가 가진 그릇 중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젓가락으로 먹는다.”     


고고하게 그의 행간만 꾹꾹 짚어가다 어느 순간 무너질듯한 느낌이 온다. 라면 생각이 점점 간절해진다. 한밤 중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간신히 누르고 아침을 기다리며 잠들었다.      


오전 9시 30분. 아들을 막 등교시킨 이 시간의 여유와 공기를 격하게 애정 한다. 지난밤 영어 숙제 때문에 아들과 엄청난 신경전을 펼쳤다. 그 와중에 샤우팅 한번 안 하고 꼿꼿하게 김훈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은 스스로가 대견하다. 어젯밤 신경전과 라면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라면 한번 끓여볼까? 라면 끓이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라면 끓이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람. 한데 나는 라면을 찾아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어제 마음과 달리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들이 조르고 조르면 어쩌다 한 번씩 끓여주고 한입, 두입 뺏어먹는 정도다. 혼자서 라면 하나 끓였다 끝까지 먹지 못하고 싱크대 하수구로 버린 기억이 몇 번 있다. 그 이후로 나를 위한 라면은 끓이지 않는다.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라면에 대한 고찰로 줄타기를 하다 11시 즘 넘어서야 호기롭게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먹었다. 내친김에 언니가 건네준 김장김치도 냉장고에서 꺼냈다. 라면을 통해 대작가님과 정신적 교감을 하는 것 같아 짜릿함마저 느껴진다.     


끓는 물에 라면 반 정도를 툭 쪼개서 집어넣었다. 반 정도 남은 라면은 봉투에 고이 넣어두려다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 사실 끓인 라면보다 생라면을 더 선호한다. 내적 갈등 끝에 그나마 한 귀퉁이만 잘라 낸 거다. 오랜만에 입속으로 생라면을 넣어본다. 오드득 오드득 식감이 신명 난다. 아들과의 신경전으로 밤사이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이제야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으응? 반대쪽 한 귀퉁이를 더 잘라내 짭짤한 수프에 콕 찍어 입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잘 참고 살았는데 라면 봉투를 뜯으니 속수무책이다. 생라면의 바삭거리는 식감은 좀처럼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끓인 라면은 다 먹지 못한 채 생라면만 우적우적거린다. 역시나 이번에도 옆길로 빠지고 말았다. 김훈 작가님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생라면을 씹어 먹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언제 즘 그의 책을 오롯이 완독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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