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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Nov 29. 2022

계절의 글쓰기

 “척, 쏴아아, 척, 쏴아아”     


굵은 거품을 뿜어내는 파도가 바위에 세차게 부딪친다. 단단한 바위를 향해 거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이내 몸을 낮추고 잔잔하게 빠져나간다. 밀물은 순식간에 썰물이 되어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해 돌아간다. 불편했던 마음이 썰물과 함께 씻겨나간다.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길목에 속초 여행을 떠났다. 하루 밤 자고 오기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하루 코스로 잡았다. 오전 9시 출발, 서울 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부지런히 내달린다. 점심 즘 도착해 설악산 케이블카 타고, 순두부 먹고, 바다 한번 보고 올 계획이다.      


출발  음침한 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이 고맙게도 파란 얼굴을 내민다. 날씨가 흐리면 흐린 대로 좋고 맑으면 맑은 대로 좋은 여행길이지만 기왕이면 맑고 청명한 날씨가 좋다. 설악산 주차장에 차를 세운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입구 쪽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살결에 닿는 신선한 공기가 도심지의 그것과 다름이 느껴진다. 얼마 만에 강원도인가.      


설악산 입구 쪽 매표소에 섰다. 커다란 글씨가 적힌 종이쪽지가 매표소 유리창에 붙어있다. 내일까지 케이블카 점검 중. 응? 케이블카 타러 3시간 달려왔는데 뭔 소리여. 눈을 크게 뜨고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내일까지, 케이블카, 점검 중, 이라는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글자의 자태는 얄미울 정도로 각이 잡혀있다. 에휴, 김이 살짝 빠지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몇 시간 뒤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1분 1초가 아쉽다. 일단 순두부를 먹으며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발길을 돌려 순두부 집으로 향했다. 평일인데 사람이 꽤 많지만 다행히도 웨이팅 없이 앉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본다. 옆 테이블 60대 정도로 보이는 4명의 아저씨들이 식사를 거의 마친 상태다. 마무리 물 한잔을 마신 후 “허어, 잘 먹었다”라며 그네들 특유의 추임새를 뱉어낸다. 흡족스러운 표정이다.         


대각선 건너편 50대로 보이는 3명의 아줌마들은 한창 식사에 몰입 중이다. 이 반찬에서 저 반찬으로 옮겨가는 눈동자가 소녀의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빠른 속도로 오물오물 거리는 입 모양새와 함께 손놀림도 분주하다. 그 와중에 무언가 열정적으로 대화하는 그녀들.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해내는 듯한 그녀들의 동작이 신기하다. 나도 여자지만 신의 경지에 오른 여인들의 멀티 동작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드디어 차례가 왔다. 테이블에 깔아놓은 불투명한 비닐 위로 순두부와 반찬들이 올라온다.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한 수저 떠 건너편 여자들처럼 입을 오물오물거렸다. 케이블카의 아쉬움이 이내 사르르 녹아내린다. 하얀 쌀밥 위에 순두부를 올려 본격적으로 쓱싹쓱싹 비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목으로 순두부를 넘기기 전 젓가락으로 곤드레 나물도 집었다. 순두부와 잘 삶아진 곤드레 나물이 부드럽게 입안을 감싼다. 동작이 느리고 멀티가 안 되는 대신 오직 맛에만 집중할 수 있다. 깻잎, 황태 무침, 오징어젓 등 곁들여 나온 반찬들 또한 하나같이 맛이 좋다. 한 끼 식사로 속초 여행을 다 한 기분이다.      


만족스러운 배를 쓰다듬으며 울산바위가 보인다는 뷰 맛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창밖 너머 정면에 떡, 하니 울산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검정 고무신> 주인공 헤어스타일 같기도 하고 노란 머리 <심슨 가족>과 닮은 듯한 바위의 뾰족뾰족한 머리 모양새가 재미있다.



울산바위를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한 산의 모습은 수묵 담채화에 나올법한 위엄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그에 반해 오른쪽 산봉 오리들은 파란색 하늘과 어우러져 알프스 산맥이 떠오른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앞에서 목도할 때마다 그 경이로움에 마음이 일렁인다. 동양의 미와 서양의 미가 공존하는 설악산의 웅장함이 시선을 압도한다.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다. 일박이일로 잡을 걸. 다행히 바다 볼 시간은 남아있다. 굵고 짧게 산을 감상한 후 외옹치항 바다 향기로로 발길을 돌렸다.      


파란 하늘 아래 그보다 더 강렬한 파란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는 중인 바다는 푸른빛에 회색빛이 더해졌다. 바다의 색은 은은한 듯 강렬하지만 질감은 편안하고 포근하다. 바다가 주는 편안함과 포근함에 기대어 안겼다. 늘 있던 자리에서 묵묵하게 곁을 내어주는 바다.      


바다의 너른 품이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칙칙한 마음을 토닥여준다. 며칠 쓰기의 힘든 주기가 찾아왔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글을 써왔다고 생각했다. 다운타임이 찾아와도 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고 자신했다. 얼굴에 책임질 나이를 맞이할 즈음부터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줄 알았다. 여전히 글자와 문장에 매몰되는 모습이 한심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기분이다. 계절을 건너는 바다가 나에게 말을 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봐. 잘하고 있어. 완벽할 필요는 없어. 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괜찮아. 가끔 흔들려도 괜찮아. 가끔이 뭐야, 여러 번 수도 없이 흔들려도 상관없어. 몸과 마음, 주변 상황들. 균형만 잘 맞추면 돼.”     


바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강원도에 오길 잘했다. 바다에 오길 잘했다. 언제든 다시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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