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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성 Nov 25. 2019

블라디보스토크의 수류탄 칵테일

러시아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맛있는 술을 마실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됐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간 동생이 바 풍경과 러시아 사우나, 호텔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동안 가본 여행지에서는 보지 못했던 생경한 풍경, 생소한 색감, 구 소련의 향기가 물씬 나는 미지의 세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류탄 모양의 머그에 주는 칵테일이 나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끌었다.


러시아에서는 영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가보니 실제로 그랬다. 다행히 문명의 발전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택시를 탈 때는 우버와 비슷한 '막심' 어플이 있어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어플이 없었다면 러시아 여행은 꿈도 못 꿨겠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두 번째 밤에 수류탄 칵테일을 파는 바에 갔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블라디보스토크지만 이곳에는 한국인이 우리밖에 없었다. 낮에 갔던 레스토랑에서 많은 한국인들과 마주쳤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상당히 넓은 규모의 레스토랑은 만석이었고 대부분 현지인인 것 같았다. 가기 전부터 눈독 들이던 바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 러시아어 메뉴판과 한국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메뉴를 아무리 샅샅이 훑어봐도 수류탄 칵테일이나 그 비슷한 메뉴는 없었다. 이럴 수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의지할 것은 구글 번역기뿐이었다. '수류탄 칵테일 있나요?'를 구글 번역에 돌려 보여주었으나 바텐더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칵테일의 진짜 이름은 알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온 티가 나는 게 조금 부끄러워 잠시 망설이다 동생이 보내준 칵테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류탄 칵테일을 만들던 러시아의 바텐더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의 알 수 없는 미소 때문에 과연 수류탄 칵테일을 만들어 줄지 헷갈리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좋지 않거나 그저 그런 경우가 많지만 수류탄 칵테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 맛이었다. 잭콕의 최상위 버전이라고나 할까. 과연 세계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다웠다. 수류탄 칵테일을 맛보자마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사랑하게 됐다.


수류탄 칵테일과 함께 흥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우리는 한 잔 더, 두 잔 더 무표정한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새로운 칵테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우리에게 메뉴판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달콤한 칵테일 추천해 주세요', '새콤한 칵테일 마시고 싶어요' 우리의 칵테일 취향은 구글 번역기를 거쳐 전달됐고, 상당히 광범위하고 모호하기 그지 없는 주문에 그는 제대로 취향을 저격한 술을 만들어 주었다.


달콤함의 정도나 달콤함을 해석하는 기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칵테일 바에서 취향에 꼭 맞는 칵테일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그 바텐더와는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구글 번역기 덕분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자주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의 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구글 지도로 길을 찾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땐 구글 번역기를 사용한다. 우버나 그랩으로 택시를 잡으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가고 싶은 곳엔 어디든 갈 수 있다. 블로그에 남겨 놓은 사람들의 리뷰를 참고해 묵을 호텔이나 가볼 식당을 미리 정할 수도 있다. 그 나라 말을 하나도 못해도 원하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


스마트폰은 있었지만 우버가 없던 해 홍콩에서는 호텔 주소를 A4 용지에 적어가 택시를 탈 때마다 그 종이를 펼쳐 보여주곤 했다. 여행 마지막 날엔 그 종이가 너덜너덜해졌고 <러브 액추얼리>도 아니고 이게 뭐냐며 동생과 여행 내내 깔깔 웃었다. 구글 지도를 보는 것도 아날로그하게 느껴질 미래의 어느 날엔 지금의 여행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아무튼 2018년의 어느 날엔 구글 덕분에 낯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마음에 드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었다. 아마 구글이 없었더라도 그 날의 술은 모두 달콤했을지 모른다. 날씨는 춥고, 바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처럼 적당히 분주하고, 바텐더의 솜씨는 훌륭했고,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수다는 밤이 깊도록 끝날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깨달은 교훈 하나. '러시아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맛있는 술을 마실 수 있다'     

   

'수류탄 칵테일'의 진짜 이름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의 일등 공신, 구글 번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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