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에 품격을 더하다
독일로 발령이 나서 떠나기 직전 같은 아파트 라인에 인사를 하고 지내던 교양 있으신 할머니 한 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독일로 떠날꺼라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평소 온화하시고 예의 바르신 그 할머니께서는 작별을 아쉬워하시면서도 집사람에게 독일에 가면 목욕탕을 꼭 가보라고 얘길 하셨습니다. 저희는 무슨 얘긴지 잘 몰라서, 독일의 목욕탕은 뭔가 다른가 보죠? 라고 되묻자, 그 교양 넘치던 할머니께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독일 목욕탕은 혼탕이잖아!! 얼마나 재밌는데!!!
그렇게 처음 알게 된 독일 사우나에 대해 잠시 잊고 처음 독일 생활에 적응하기 바빠 정신이 없다가 정말 원치 않게 회사 높으신 분과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그것도 주말에…
참으로 불편하고 어려운 자리였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노인네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말을 맞아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삼삼오오 즐겁게 같이 사우나를 오는 겁니다. 우리가 찜질방에 친구들과 놀러 가듯이 말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 찜질방과 기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찜질방은 옷을 벗고 씻는 구간과 찜질방 상호가 크게 박혀있는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구역이 구분되어 있지만 독일의 사우나는 그 구분이 없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큰 목욕 수건을 두르고 휴식 공간에서 맥주를 마시고 스낵을 먹고 그 수건을 잠시 벽에 걸어두고 바로 옆의 탕에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구글에서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 딱 이런 분위기 입니다.
사우나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자기 몸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고 바닥에 깔아서 땀으로 바닥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입니다. 처음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독일 여성분들이 주욱 들어와서 마주 앉아 있자니 동행한 높으신 분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고,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이해… 되시나요?
사우나에는 한 가운데 돌을 달구는 화로가 있는데,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직원 분이 들어와서 허브를 넣은 물통을 들고 들어옵니다. 이 시간에 맞춰 사우나는 정말 엉덩이 붙이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찹니다.
(역시 퍼온 사진입니다)
가운데 뜨겁게 달구워진 돌 위에 허브 물을 한 바가지씩 부으면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와 사우나를 가득 채웁니다. 이때 물을 뿌리는 직원이 커다란 수건으로 허공을 저으며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열기를 날려줍니다. 가뜩이나 뜨거워서 못 견디고 있던 저는 도저히 못 참고 중간에 나왔지만 독일 사람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이 순간을 즐깁니다. 다들 만세를 부르길래 뭐하나 했더니 겨드랑이까지 이 뜨거운 열기를 쐬는 것이었습니다.
사우나에 따라서는 탈의실부터 같이 쓰는 곳도 있어, 독일 여성과 라커 앞에서 눈 인사를 하고 나란히 서서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유럽의 자연 편에서 언급했듯이 유럽의 겨울은 비도 많이 오고 흐리고 깁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거의 6개월을 이런 궂은 날씨 속에 버텨야 합니다. 사우나의 역사에 대해서는 독일 친구들간에도 의견이 엇갈리지만 가장 오랜 역사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과거 게르만족들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유럽의 겨울은 정말 고단하고 지루한 기간으로, 북구에서 내려온 게르만 족들에게 사우나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이자 가족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던 문화유산이라는 설명입니다. 사뭇 이해가 되는 것이 사우나란 말 자체가 핀란드 어에서 왔을 만큼 독일보다 더 사우나가 친근한 나라는 북 유럽 국가들입니다. 일 가구 일 사우나를 표방할 만큼 사우나가 문화의 일부로 깊이 들어와 있고 겨울이 혹독하기에 그만큼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친구의 설명은 중세 시대 결혼식의 피로연 때 신랑 신부 친구들이 같이 목욕을 하던 풍습을 얘기합니다.
가장 최근의 설명은 페미니즘 관련으로, 과거부터 사우나 문화는 있긴 했지만 자기 부모님 세대엔 사우나가 이렇게 활성화 되지 않았었는데 자기가 어렸을 적, 70년대 들어서 아주 대중화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페미니즘이 독일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나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성 평등이며, 이성의 육체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FKK(Frei Körper Kultur/Free Body Culture 몸이 자유로운 문화/자연주의)라고 적극 권장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사우나에서 두리번거리거나 빤히 쳐다보는 것은 매우 실례로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핀란드나 독일에서도 사우나가 젊은 층에게 점점 더 외면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선 어려서부터 인터넷을 통해 이성의 나체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 있고, 중동, 터키 등 보수적인 이슬람 이민자들의 증가로 이성간의 혼욕을 꺼리는 젊은 층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 오면서 목욕중인 이성을 빤히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히히덕 거리는 등 많은 불만을 낳고 있는데 저는 중국 관광객들과 마주친 적은 없지만 한 한국인 젊은 커플이 자기들은 온 몸을 목욕 수건으로 칭칭 감고서 돌아다니며 소근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나체로 완전 무방비로 있다가 같은 한국인 이성에게 빤히 쳐다 봄을 당해보니 보통 기분 나쁜게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특정 요일엔 아예 여성들만 가는 날로 지정을 하는 등 변화가 생기는 중입니다. 혹시 사심(?) 가득 가실 일 있으면 반드시 요일을 확인하시길 바라며, 아무리 호기심이 넘치더라도 절대로 빤히 쳐다보거나 하는 실례된 행동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앞서 언급한 FKK가 지금은 그저 자연주의라는 순수한 의미보다는 매춘시설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입니다. 독일에서는 매춘이 합법이긴 하지만 시내가 아닌 교외의 지정된 장소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정된 장소를 속어로 FKK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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