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내 Sep 26. 2024

12년차 직장인, (완전)퇴사를 결심하다.

08. 이게 맞아?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될 것 같아

남편을 못 본 지 2년이 다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맞나? 어떤 부부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주변에서도 슬슬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주재로 나가있는 곳의 커뮤니티가 있어 그곳의 글들을 자주 보았다. 코로나로 인해 나처럼 남편과 떨어져 이산가족으로 지내는 가정들이 적지 않았기에 다소 안심하기도 했고, 특별입국으로 나가는 케이스도 많아지는 걸 보면서 불안하기도 했다. 이 코로나는 도대체 언제 종식돼서 자유롭게 출입국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제 남편도 나도 나이를 먹었고, 내가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자녀계획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남편과도 종종 이 이야기를 했다. 난임 전문 산부인과를 찾아가 산전검사를 받았고, 자궁 초음파, 난소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한 혈액검사 등도 했다. 다행히 난임 진단이나 바로 시험관시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고, 오히려 자연임신이 가능하니 앞으로 같이 노력해 보자는 응원을 받았다. 남편도 함께 검사를 받았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한국에 올 수도 없으니 차일을 기약했다. 남편에게 산부인과에 다녀왔다는 일상을 공유했지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쳤지만 어차피 이젠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굳이 지금부터 남편에게 심적 부담감을 주진 말자 생각하며 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무시했다.  


흘러넘치기까지 마지막 한 방울 

남편의 업무 강도는 센 편이었고, 스트레스도 높은 직군에 속했다. 그래도 본인의 취미인 골프를 스크린이든 필드든 신나게 즐기는 탓에 스트레스를 나름 잘 풀어 나가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나 과로사할 것 같아'는 메시지를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투정을 받아줬겠지만 그 날 만큼은 '과로사'라는 단어에 꽂혀서 날을 세웠다. 내가 그날 갑작스레 직장 동료의 조문을 다녀올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숙연해진 것도 있었지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남편이 전날 골프 필드 라운딩 후 뒤풀이에서 막걸리를 두 병이나 마셔서 힘들다 했었다. 말과는 다르게 퇴근 후 스크린을 두 게임이나 쳤다면서 '돌연사' 타령을 했기 때문이다. 


일 끝나면 본인이 하고 싶은 골프, 술, 모임 등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남편, 사위, 아들로서의 의무는 면책상태이기까지 한데 뭐가 과로사할 것 같다는 건지 순간 화가 났다. 명절, 생신, 어버이날 등 모든 이벤트를 나 혼자 다 챙겼는데 말이다. 남편이 죽는다고 상상하니 이렇게 신혼만 보내고 빚만 갚다가 과부가 된다는 게 너무 억울하기도 했고 옆에 있으면 화라도 내며 그 자리에서 풀 텐데 그저 혼자 울며 푸는 수밖에 없는 것도 너무 싫었다. 


혼자 울다가 남편에게 그날의 내 기분과 코로나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쌓였던 서러움, 혼자 모든 걸 해내야 하는 스트레스를 담은 장문의 카톡을 몇 개나 보냈다. 과로사할 지경인 그는 이미 잠들어 버린 것 같았고, 혼자 폭주했다. 울고 있는 셀카까지 찍어 내 메시지가 진실됨을 증명하는 유치함까지 함께 보내버렸다. 다음날 남편은 울었냐며 슬프다고 했지만 그저 카톡 엔터 몇 번으로 끝이었다. 유야무야 내 메시지를 넘기려는 그에게 아무 일 없는 듯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내년에는 꼭 같이 사는 방향으로 결정하자'

좀처럼 하지 않는 나의 징징거림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걸까? 남편은 내년 2분기 안으로 내가 남편의 주재지로 가든, 남편이 한국으로 오든 꼭 같이 사는 방향으로 결정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한껏 불안하던 마음이 몇 줄의 문장으로 좀 가라앉았고, 동시에 내 삶에 큰 결정을 앞두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21년 크리스마스가 또 다가오고 있었다. 집에서 혼술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취기가 오르면 남편과 화상통화를 하며 외로움과 걱정을 담은 힘듦을 토로했다. 남편은 '이제 진짜 그만 떨어져 지내야지~내년 크리스마스는 꼭 함께 보내자'라고 울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고 그 말은 내게 '네가 일을 그만두고 빨리 이곳으로 와서 같이 살자'처럼 들렸다. 남편의 회사는 본사의 최소 기능과 R&D센터를 제외하고 모든 주요 부서들을 해외 법인으로 이전시켜서 한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면 아예 일을 그만두고 제2의 직업을 알아보는 일뿐이었다. 


이제 나만 결심하면 되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과 코시국 3년 차가 되면서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