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차 직장인, (완전)퇴사를 선택하다.
11. 이제 내 결심만 남았다.
8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
남편과 연애시절 제주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만났다. CC가 으레 그렇듯 우리도 모두의 눈을 속였다 착각하며 비밀연애를 했었다. 같은 날 연차를 내서 제주도를 가면서 말이다. 아무튼 다시 방문하기까지 그사이에 우린 결혼을 했고 8년 만에 다시 제주도를 여행했다.
우리의 여행스타일은 대략적인 지역만 선택 후 숙소도 그날 예약해 방문하는 것이었다. 원래 둘 다 MBTI는 J인데 일이 아닌 여행은 P스럽게 즐겼고, 3박 4일 동안 날씨도 좋아 모든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다. 이때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제 진짜 같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렌터카로 이동하며 맛집을 찾아다녔고, 제일 마지막이 숙소 체크인이라 같이 술을 먹을 기회가 없다가 마침 숙소 앞에 제주흑돼지 전문점이 있어 같이 소맥을 마셨다. 둘 다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해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로 바로 앞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한국보다는 당연히 좋진 않겠지만 메이드도 있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회사 형들 얘기 들어보니 주재원 따라온 아내들 모임도 있대. 그 모임 재밌어서 밤늦게까지 술 모임 갖기도 한다고 하더라!"
남편이 대충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 모임에 들어가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술도 마시면서 그 나라 생활에서의 즐거움도 찾을 것이고 잘 적응해 나갈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겠지.
역시나 회사는 잘 돌아간다
부부 모두 열흘 이상의 장기 연차를 낸 덕에 틈틈이 회사 업무를 체크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휴가 때는 회사의 조직문화 및 팀장님의 성향상 거의 연락이 오지 않는 편이었고, 휴가 전에 이미 업무 처리와 부재중 알림을 해놨기에 긴급으로 처리할 일들이 없었다. 가끔 회사 메일을 열어보면서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음에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고, 한편으론 지금 당장 그만둬도 팀에 큰 영향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앞의 글에 적기도 했지만 대리 시절에는 물리적으로 일이 참 많았다. 팀원 누군가 빠지면 남은 팀원이 그 몫을 나눠 일해야 했기에 긴 연차는 신혼여행 말곤 써본 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하루 연차에도 메신저나 메일로 업무들을 처리해야 했고, 다음날에도 일상의 반복이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았는데 그래도 '내가 할 일이 있고, 쓰임새가 있구나' 같은 (바보같은)생각을 했었다. 그냥 그 팀이 비효율적으로 인력을 갈아 넣어 운영되는 거였는데도 이상한 데서 내 자존감을 채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좀 달랐던 건 본인의 부재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존재의 이유를 인정받지 못한다며 쉴 틈 없이 메일과 카톡으로 업무 대응을 해 나갔다. '나 휴가 중이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를 피력하면서 말이다. 외벌이가 될 수도 있으니 더욱 존재감을 뽐내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남편이 조직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살아남은 한 방법이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 둘 결심을 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휴가를 나왔던 이때는 2022년 5월이었다. 코로나도 종식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졌고 이제 자가격리 없이 해외를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PCR 결과지가 필요했지만!)
제주도 여행 이후에는 나의 해외 거주 준비를 위한 현 직장 정리, 집 전세 처리 등 굵직한 문제들을 논의했고,
나는 8월 경 건너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이에 맞춰 입국 비자 및 거주증 신청, 비행기 티켓 등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 글에 언급한 적은 없지만, 이미 2022년 2월에 남편은 내와 거주할 집을 렌트해 둔 상태였다. 그때는 당장에라도 내가 해외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래저래 미뤄졌었고 남편 회사의 주재원 지원 정책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며 가능할 때 미리 집을 얻어 두자고 했기에 최적의 매물이 나왔을 때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의 생활을 잘 정리한 후 간단한 짐과 몸만 옮기면 끝이었다.
휴가를 낸 보름이 훌쩍 지났고 남편은 회사에 복귀를 하기 위해 다시 출국을 했다. 이제 나는 회사에 사직을 고한 후 후임을 채용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면서 내 커리어를 잘 정리해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팀장님과 미팅을 잡으려고 며칠간 고민했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닥친 프로젝트들을 쳐내며 바쁘게 보냈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6월이 되고 드디어 팀장님과 개인 면담을 잡았다. 팀원이 이렇게 갑자기 '드리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하면 긴장부터 한다는 글을 어딘가서 봤는데 내가 아는 팀장님은 당황하시지도, 슬퍼하시지도 않을 것 같아 큰 걱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