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투라Futura는 쓰지 마세요
얼마 전 서점에서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더글러스 토마스, 2018)』 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푸투라(futura)는 1927년 독일의 디자이너 파울 레너가 디자인한, 기하학적 형태의 미를 품은 모던 산세리프(1920-30년에 바우하우스(Bauhaus)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가로 획과 세로 획의 굵기가 비슷한 서체) 활자체이다. 푸투라는 그 자체가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 덕분에 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선택을 받았는데, 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나이키, 데이비드 핀처, 바바라 크루거, 게릴라 걸스, 보그, 루이비통, 스위스 항공, 이케아와 폭스바겐, 독일 사민당과 영국보수당에서 NASA와 러시아 연방우주공사까지. 이렇게나 많은 기술과 브랜드, 취향과 예술에 모두 푸투라가 사용되었다. 단순히 하나의 서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문화 면면에 기여한 ‘이미지’ 로서의 서체를 말하는 것이다.
서체는 이미지다. 나이키의 ‘JUST DO IT’에 푸투라 엑스트라 볼드 컨덴스드(글자 폭이 좁은 서체 패밀리)가 사용된 이후 광고와 브랜드에 푸투라가 자주 등장하자 1992년 '푸투라 엑스트라 볼드 컨덴스드 사용에 반대하는 아트 디렉터들 (Art Directors Against Futura Extra Bold Condensed)' 이라는 캠페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캠페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푸투라로 통용되는 클리셰를 벗어나 새로운 문화 이미지를 만들 필요성을 재고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예술과 문화는 이미지의 싸움이다. 명확하면서 차별성을 가지는 브랜드 이미지는 사용자에게 오래 기억된다. 나이키와 데이비드 핀처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확장하는데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서체를 사용한 브랜드를 살펴보자.
애플Apple Inc.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 애플은 지난 3월, 캘리포니아 애플 본사에서 열린 March Event에서 새로운 신용 카드인 애플 카드를 공개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https://www.apple.com/apple-card/ ) 그 중 많은 디자인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카드 소유자의 이름이 San Francisco 서체의 둥근 버전으로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애플의 본사가 위치한 지역명인 San Francisco와 동일한 이름의 이 서체는 애플 사에서 개발한 산세리프 서체로, 맥 OS, iOS, tvOS에 쓰이는 San Francisco, 워치 OS에 쓰이는 San Francisco Compact, X코드 어플리케이션에 쓰이는 SF Mono의 3가지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서체는 Display와 Text로 나뉘는데, 큰 글씨를 사용할 때엔 Display를 사용하고 작은 글씨를 표시할 때에는 Text를 사용하며 각각은 자간과 알파벳의 몇몇 부분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San Francisco서체를 두고 ‘동적 서체’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 있다. 시스템 환경에 따라 서체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는 San Francisco서체는 브랜드 애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유동적으로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WWDC 2015이전, 애플은 Helvetica Neue를 시스템 폰트로 사용하기도 했다.(OS X 요세미티가 대표적이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서체 Helvetica와 San Francisco의 조형성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https://medium.com/@amachino/the-secret-of-san-francisco-fonts-4b5295d9a745)
헬베티카Helvetica가 힐러리Hillary Clinton를 만났을 때
앞서 잠깐 언급했던 서체 헬베티카(Helvetica)는 1957년에 스위스의 하스(Haas) 활자 주조 회사에서 막스 미딩거(Max Miedinger)와 에두아르드 호프만(Eduard Hoffmann)이 개발한 대표적인 로마자 산세리프 서체다. 푸투라 못지않게 헬베티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산세리프 서체 중 하나인데, BMW, 맥도날드, 루프트 한자, Samsung과 애플까지. 헬베티카는 지금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는 서체이다.
헬베티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더욱 익숙하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미국의 16년 대선 때로 돌아가서 살펴볼 수 있는데,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 출마 발표와 함께 공개한 로고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성조기의 붉은색과 파란색을 사용하면서 이름의 ‘H’ 이니셜을 활용한 로고를 발표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픽 디자이너 릭 울프(Rixk Wolff)는 그녀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H’에서 파생된 서체 ‘힐러리 볼드(Hillary Bold)'를 제작한다. 하지만 이후 SNS 상에서 퍼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 서체를 힐러리와 헬베티카를 합친 ‘힐베티카(Hillvetica)’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화살표의 방향성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적 혼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힐베티카의 사례는 한 정치인의 철학을 서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선거 캠페인을 어디까지 성공적으로 브랜딩화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서체는 디자이너 릭 울프의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아 사용할 수 있다! http://rickwolff.com/hillary-bold-truetype-font
*버락 오바마의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CHANGE’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용된 서체 Gotham과 18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선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의 포스터에 등장한 햇빛 스튜디오의 레터링 디자인 역시 정치인의 철학을 서체에 반영해 이미지를 만들어낸 흥미로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감각하는 방법
"활자를 만드는 건 장시간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에요. 확 빠져들었다가 나오면 기운이 소진돼요. 기를 쓰는 작업이라. 하면 할수록 서체를 만드는 작업은 서예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예는 글자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지요. 한 획에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자신의 기를 불어넣는 거예요. 서체도 만든 사람의 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활자는 정신의 산물이지요.”
한글 서체 디자이너 안삼열씨가 했던 이야기이다. 서체를 디자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서체를 이루는 글자의 조형성과 더불어 실제 단어와 문장을 적을 때의 조형성을 다르게 설계해야 하고, 서체가 적용될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할 수 있는 규칙도 함께 구축해야 한다. 특히 한글 디자인의 경우 자음과 모음, 받침까지 조합한 한글 완성형은 1만 1172자이다. 그 모든 수를 디자이너가 고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서체는 그저 글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글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치열한 이미지를 품은 채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서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서체는, 단순한 글자를 넘어 사람의 생각과 시대상이 반영된 문화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체를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감각하는 방법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