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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min Yun Jan 07. 2020

그럼에도, 종이책을 삽니다.

아직까진 전자책보단 종이책이 좋은, 개인적인 이유들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어떻게든 꾸준히 흘러가는구나 하며 뒤늦게나마 올 해의 계획이란 것들을 세워보고 있다. 그동안 맞이했던 최근의 '새해'들은 늘 그 자체로 내게 모종의 책임감을 건네는 때가 많았는데, 올해 나의 책임감은 작년보다 더욱 많은 책을 읽어야지. 하는 개인적인 욕심에 닿아있다. 이는 단순히 읽는 책의 숫자를 늘린다기보다는 작년에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여러 분야의 책, 특히 지금의 한국 문학들을 챙겨 읽고 싶다는 생각에 더 가깝다. 때문에 올해의 첫 책만큼은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시리즈 중에서 고르기도 했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가끔씩은 책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낯 뜨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책을 좋아하는데 뭐라 에둘러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요즘엔 그냥 얘기하고 다닌다. 정말로 책을 좋아한다고.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사는 것을 즐기는 성향 탓인지는 몰라도 책에 흥미를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방의 많은 부분을 책들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물론 전자책을 시도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책들로부터 나의 방을 사수하기 위해 밀리의 서재를 약 네 달 정도 구독해 가지고 있던 아이패드와 핸드폰을 오가며 책을 보기도 했었고, 잠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리디 셀렉트를 통해 여러 책과 아티클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산다. eBook 리더기를 구입했다면 나의 전자책 독서 경험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오늘도 내가 책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들이 종이에서 전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대게 생략되거나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1. 눈에 보여야 더 '잘' 읽히는 책


리디 셀렉트를 구독하고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류츠신의 SF 소설 '삼체'였다. 무려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영업당해 언젠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한눈에 보아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의 두께와 표지부터 풍기는이과적 모먼트 때문에 삼체는 늘 나의 도서 구입 목록까진 오르지 못하는 책이었다. 그렇게 새해가 아니면 또 언제 읽어보겠냐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삼체는 이상하게 읽는데 속도가 붙지 않았다. 함께 다운받은 이경미 감독님의 에세이집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툭툭 걸리면서 읽어나가는 데에 리듬감이 생기지 않는 답답한 느낌.

리디 셀렉트로 읽고 있는 삼체. 언제쯤 다 읽지..

두꺼운 걸로는 만만치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시리즈를 읽을 때가 떠올랐다. 언제 완독 하려나 싶었던 두꺼운 세 권의 책은 구입할 때의 우려와는 달리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에 전부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1Q84'와 '삼체'는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가 다르기에 그 둘을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종이책과 전자책의 관점에서 둘의 독서 경험을 비교해 보았을 때, 적어도 내겐 이 책이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 책인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상황에서의 독서가 훨씬 편하고 리듬감 있게 진행되었다. 책의 전체 분량에서 내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다음 챕터까지는 얼마만큼이 남아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읽을 때에 비로소 이 책 한 권을 나의 속도감으로 원활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힘이 세다. 전체를 먼저 눈에 익히고 그 부분을 읽어나가는 종이책의 특성은 알게 모르게 사용자에게 일종의 네비게이터 역할을 한다. 더불어 눈에 보이면 읽고 싶고, 다 읽은 후에도 눈에 맴도는 책은 사용자에게 재독서를 유도하는 리마인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내겐 공간에 실재하는 종이책이야 말로 좋은 독서 경험에 더욱 가까운 선택지였다.



2. 물성만이 얘기할 수 있는 것들


작년에 읽은 책 중에서는 유독 표지가 기억에 남는 것들이 많았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특별판이 그랬고, 민음사 쏜살문고에서 나온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이 그랬다. 다른 관점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책은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새로 나온 리커버판 이전의 오리지널 버전)이었다. 이 책이 독특했던 이유는 커버에 쓰인 종이의 촉감 때문이었는데, 커버의 몽글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정말이지 책의 결과 너무 잘 닿아있어 디자이너분께 직접 종이의 종류와 인쇄 기법을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표지 용지로 자주 쓰이는 몽블랑 종이에 이지 스킨으로 후가공 처리를 해 고무와 비슷한 효과를 냈던. 이 커버에 이끌려 책을 선택했을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음사 쏜살문고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디자인. 일러스트레이터 이빈소연이 책마다 이어지는 표지 그림을 그렸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얼마 전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다가 정말 그렇지 하며 공감했던 문장이다. 특히 책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면 물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어떤 서체로 책이 조판되었는지, 내지와 표지 혹은 간지에 쓰인 종이는 어떤 재질과 색을 지녔는지. 커버에는 어떤 디자인이 들어가 있으며 책의 판형과 두께는 어떠한지. 물성이 있어야만 감각할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은 알게 모르게 독자가 책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런 감각들이 배제된 채로 책을 읽는 것이 전자책에선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3. 수고롭게 읽었을 때 오래 기억되는 문장들


책을 '읽는다'라는 행위에는 기본적으로 독자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겐 그 '의지'라는 것이 책을 더욱 수고롭게 읽는 것으로 구현될 때가 많다. 독서라는 복잡한 활동을 제대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자주 페이지를 접고, 밑줄을 치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해진 방향 없이 페이지를 자주 돌이키며 책을 읽는다. 물론 이런 활동들은 지금의 전자책 뷰어들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기능일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페이지 귀퉁이를 접는 것과 버튼을 통해 북마크를 해두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 지도는 땅이 아니고 라면 사진은 라면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게 전자책에서의 북마크, 하이라이트 등의 기능들이 실제 세상에서의 행위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오늘날 무언가를 '아카이빙'하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는 '북마크' 역시 본래는 수고롭게 책을 접거나 무언가를 책에 직접 붙이는 행위에서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나의 경우는 무언가를 조금 더 수고롭게 했을 때가 훨씬 머리와 마음속에 오래 남았고, 독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유용성'에는 언제라도 동의한다. 더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다독하기 위해서라도 전자책은 늘 내게 좋은 선택지로 남아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최근 리디 셀렉트를 이용하면서 다른 전자책 구독 서비스에서 볼 수 없던 형광펜 기능을 경험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자책 독서 경험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변화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갖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책은 무수히 많은 형태로 그 모습을 달리할 것을 나는 안다. 사람들은 이미 종이책과 전자책의 구분을 넘어 듣는 컨텐츠로 책을 소비하기도 한다. 당장 내년에, 그리고 5년과 10년 후에는 책이 어떤 모습일 수 있을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작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올해의 나도 무수한 종이책과 함께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책은 늘 언제고 변함없이 내게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보지 못한 이들을, 생각해보지 못한 무수한 것들을 선물해 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책을, 종이책을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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