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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min Yun Sep 28. 2020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

르 코르뷔지에부터 피카소까지, 공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관하여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 공간과 건축


우리는 공간에서 태어나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렇듯 공간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공간의 디자인이 중요한 것은  때문일 것이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인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그는 건축을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지혜이며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욕실로 자연의 빛을 이끌어 오는 것에서부터( 코르뷔지에에게 욕실은 자유 평면 le plan libre 조형적 공간을 극적으로 만드는 오브제 투르베Objet trouvé 였다), 주변 환경에 따라 유입되는 모든 것의 동선을 계획하는 ,  코르뷔지에는 자연을 거스르는 공간을 그토록 멋지게 구축했다. 자연과 건축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함께 녹여낸 그의 건축물은  인간이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대상을 향했다. 단순히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인간 외부 세계 사이의 중심을 잡아주는 예술성을 건축에 부여했던 것이다.


올해 4월 나는 자취를 시작했다. 회사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심플한 바람과는 달리 나의 공간을 구하고 구성하는 일은 꽤나 힘이 들었다. 실은 아주 예전부터 나는 엄마와 집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었는데, 우리는 서로가 살고 싶은 집의 이미지를 나누고, 지금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그 이미지를 구현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공간에 애착을 부여할수록 공간은 나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집을 착실히 돌볼수록 오히려 집에 얽매인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Villa Savoye, 1931 by Le Corbusier


Bathroom, Villa Savoye, Exterior Buildin, Digital Image by Le Corbusier




공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과정


새로 도배한 벽지 위로 짙은 푸른색의 커튼을 달고, 좋아하는 쿠션을 배치하고 액자와 책들을 이리저리 옮겨보면서. 나는 비로소 처음 생긴 나의 '집'에 나름의 예술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애정을 부여할수록 집은, 공간은 참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부 쏟아내듯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따듯하고 편안한 공간일 수 있는지를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알려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집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자취를 하기 전의 동네에서도,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조그마한 이 집에서도. 언제고 마음 놓고 도망칠 수 있던 우직한 방공호처럼 항상 거기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나의 '인식'이 닿을 기회가 없었을 뿐.


마치 뒤샹 Marcel Duchamp이 변기를 예술품으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레디메이드 Ready-made 예술로 칭할 수 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유가 생긴 창가 자리에 어떤 화병을 놓아볼지 고민하고, 어떤 엘피로 잠들기 전 나의 방을 채워볼까 고민하는 것 모두 나의 공간을 더욱 깊게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나를 공간에 발 묶어 두는 것 같은 감상은 이젠 곁에 없다. 오히려 그 모든 공간에 대한 관심이 예술을 향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Fountain 1917, replica 1964 by Marcel Duchamp




하나의 피사체로서의 공간


피사체를 여러 방면으로 살펴보며 발견한 다양한 미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는 것. 다르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기존에 잘 보려고 하지 않던 것의 나열을 통해, 생경한 미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사람들은 큐비즘 Cubism을 두고 이렇게 얘기한다. 큐비즘의 대표 화가 피카소 Pablo Picasso의 회화에  독일의 평론가 칸바일러 Daniel-Henry Kahnweiler는 '현상학적'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가 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다양한 관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비로소 시간과 애정을 가지고 세심히 살펴보아야 그 대상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하나의 피사체로 보고,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를 한 사람의 화가로 바꿔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우리가 공간을 여러 시선으로 인식하며 살뜰히 가꿔주는 것은 피카소가 위치를 바꿔가며 대상을 고찰하던 것과 유사한 것이 된다. 공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각자의 공간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ortrait of Daniel-Henry Kahnweiler, 1910, Pablo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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