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늙은호박이 안겨 준 희망과 행복 그리고 사랑
한여름 커다란 호박잎 사이로
군데군데 달린 늙은호박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꽉 찼습니다.
그 곁으로 다가설 때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는 속담이
여지없이 떠오르면서,
이 둥글넓적한 생명이 저한테 분명
복덩이가 돼 줄 것만 같았어요.
시나브로 가을이 왔어요.
주황빛으로 물든 늙은호박을 거둡니다.
단단하고 묵직한 데다가
신데렐라 동화 속 호박마차를 쏙 빼닮았네요!
뽀얗게 분 가득한 자태가 참말로 이쁩니다.
호박을 심을 때,
커 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도
늘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이한테 꼭 한 번은
건강한 산골 호박죽을 끓여 주리라, 마음먹으면서요.
시월 어느 날, 기회는 왔습니다.
그 ‘한 사람’이 남쪽 어디선가
한달살이 도전을 할 거래요.
가는 길에 우리 집을 거치기로 했답니다.
기다리던 때가 드디어 온 거죠!
대망의 호박죽 끓이는 날.
늙은호박이 어찌나 단단한지 저로선
가르는 일은 엄두도 못 내겠어요.
저보다는 힘센 옆지기가 기꺼이 맡습니다.
쫙! 가운데가 열렸어요.
싱그러운 내음이 번지면서
주홍빛 속살이 드러납니다.
오호, 정말 잘 익었네요.
이 정도면 맛난 죽을 만들 수 있겠어요.
껍질도 참 두껍네요.
손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벗기고 썰고 하며 밑 작업을 합니다.
늙은호박 한 통을 다 넣자니
냄비로는 어림도 없고요,
창고에 모셔둔 큰 들통을 꺼냈어요.
호박 속 먼저 푹 익힌 다음
찹쌀 갈아 둔 것을 넣어서
기다란 국자로 젓고 또 젓습니다.
가스대 위에 들통을 얹으니
제 키 비슷한 높이가 되었거든요.
눌어붙지 않게 국자를 젓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양이 많아 익히는 시간도 길어요.
팔 아프고 다리도 힘들지만요,
들통에서 피어나는 뜨거운 김이
얼굴에 닿았다가 사르르 사라지는 느낌이
푸근해서 좋았고요.
죽이 익으면서 퍼지는 향긋한 내음은
지치지 않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반나절쯤 그렇게 몸을 부리면서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답니다.
내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잘 치유할 수 있도록
호박죽님, 부디 맛있고 건강한 힘을 주세요….
다 된 죽을 맛보았어요.
설탕이 들어가지 않아도 담백하고 달큼해요.
제가 바라고 그리던 그 맛입니다.
살짜쿵 입 짧은 ‘한 사람’도 맛있게 먹네요.
어찌나 고맙고 기쁜 일인지요!
‘한 사람’ 부부가 떠난 뒤
고이 모셔둔 늙은호박 몇 덩이를
바라보다가 어루만지다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산골 호박죽을 남쪽으로 배달하자!
‘한 사람’이 시작한 한달살이가
보름쯤 흘렀을 즈음,
다시금 늙은호박을 갈랐습니다.
처음보다 조금이라도 맛있게 해 보려고
애면글면 애를 썼더랬죠.
맛은 처음보다 덜한 듯도 하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 맛보다 정성이지~’
호박죽 두 통 그득히 담아서
남쪽으로 잽싸게 튀었습니다.
다 먹기 버겁다 하시면
도로 가져오리라 생각했죠
(저도 호박죽 좋아하거든요~).
웬걸요, 다 두고 가라네요.
호박죽이 좋다고요.
호호~♪ 이보다 더 기쁠 일은
그 순간 없었더랍니다.^^
산골 늙은호박이 준 행복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남쪽 한달살이를 마치는 날,
‘한 사람’ 부부는 산골에 또다시
발걸음을 했습니다.
제가 빌려준 물품 몇 가지가 있거든요.
그걸 돌려주기 위해서요.
이날을 맞이하기에 앞서
‘한 사람’이 집에 가져가서 먹게끔
호박죽 또 할까, 말까 고민 좀 했어요.
그이가 이 음식에 질렸을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집까지 가려면 자동차로도 한참이 걸리고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해 보자! 못 가져가면 내가 먹지 뭐.’
시월 초에 한 덩이,
시월 말에 또 한 덩이
십일월 중순에 기어이
세 번째 늙은호박 덩이를
죽으로 쑤었습니다.
한달살이 마치고 마주한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보름 전보다 한 달 전보다 훨씬
맑고 밝고 건강한 기색이 느껴졌어요.
왠지 호박죽이 한몫한 것만 같아서
히죽히죽 웃음이 번집니다.
“호박죽 또 만들었는데, 싸 줄까, 어쩔까?”
“날마다 먹어서 살짝 질리긴 하더라.
그래도 가져갈래. 너무 많이 주지는 말고, 한 통만 담아 줘.”
텃밭이 키운 늙은호박.
참말로 복덩이가 맞나 보네요.
그 이름도 무거운,
뼈에 전이된 폐암 4기 치병하느라
있던 밥맛도 사라질 형편인 ‘한 사람’한테
이만큼이나 사랑받는 걸 보면요.
정성 다해 만든 호박죽을
기쁘게 싸 주고 헤어진 날,
행복한 상상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산골 호박 세 덩이가
‘한 사람’이 건강해지는 길에 조금이나마
어쩌면 그 조금보다 조금은 더
힘을 보태 줄 것만 같다고요.
(늙은호박이 건강한 몸, 아픈 몸 모두에
참 좋다고 알고 있어서
막연한 상상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펴다가 문득
산골살이며 텃밭농사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든 나날들이 떠오릅니다.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호박죽 앞에서
괜스레 부끄럽기만 하네요.
아….
호박죽을 저보다 잘 먹던 ‘한 사람’,
그이 몸이 아픈 걸 알게 된 지
어느덧 일 년이 흘렀어요.
처음엔 꿈 같고 드라마 같고
아무튼 믿어지지 않도록 슬픈 시간이 참 길기만 했습니다.
그 시련들 덕분일 거예요.
더는 꿈처럼 드라마처럼 여기지 않아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 당차게 받아들이되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은
더 오롯이 바로 세울 수 있게 되었어요.
올가을에는 늙은호박과 호박죽 덕분에,
당당하고 아름답게 치유의 길을 걷는 ‘한 사람’ 덕택에
그 믿음이 더 단단하고 굳건해질 수 있었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늙은호박 내어준 그것만으로도
제가 선택한 이 삶을 긍정하며 사랑하고 싶다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힘도 생겼답니다.
비 머금은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어젯밤 시리도록 반짝이던 별빛이
구름에 가려졌는지 보이지 않네요.
보일 때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맴돌 듯 그 자리를 빛내는 별님이
슬며시 그리워지는 밤.
지금에 충실하고
지금을 사랑하며
오늘 하루 잘 살았다는 충만함이
천천히 차오릅니다.
내일도 오늘 못지않게
참 괜찮은 날이 될 것 같아서요,
밤늦은 이 순간
‘한 사람’을 비롯하여
밤하늘 별빛처럼 반짝이며
저에게 온 숱한 인연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만 싶습니다.
고맙다고, 그립다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