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시어머니, 아픈 큰언니가 사랑한 산골 겨울 김치
겨울비가 촉촉이 오십니다.
날씨가 푸근해서 봄비처럼 느껴져요.
비님 나리기 전
동치미 담근 항아리를 열었더니 그새 바닥이 보입니다.
그 많던 걸 거의 비웠으니
진짜로 봄이 코앞이구나 싶습니다.
자주 그랬거든요. 동치미 다 먹을 무렵이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곤 했어요.
더부룩한 속에 답답한 마음까지
시원하게 적시면서 풀어 주는 동치미.
올해는 어느 때보다 귀한 몫을 했어요.
겨울 어느 날 산골에 드신 팔순 시어머님.
소박한 밥상에서 동치미 한 숟갈 뜨시더니
대뜸 물으십니다.
“혜원아, 이거 더 있냐?”
“네, 그럼요! 항아리에 많아요.”
“그럼 나 좀 가져가자.”
“맛이 괜찮아요?”
“국물이 시원하고 좋구나.”
“입에 맞으시다니 저도 참 좋네요. 넉넉하게 싸드릴게요.^^”
다음 날 서울 가시는 시어머니는
작은 통에 동치미를 담아 가셨어요.
무어든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서
뭐라도 드리려면 한사코 마다하시는데
자청하여 먼 길 가져가시는 걸 보니까
짠하면서도 뿌듯했습니다.
“너 참 장하구나!”
동치미 항아리를 보면서 마음껏 칭찬을 해 주었어요.
또 다른 어느 겨울날,
폐암 항암 치료로 밥 먹기가 힘겹다는
큰언니한테 반찬 택배를 부쳤어요.
나물이랑 산골에서 해낼 수 있는
밑반찬들을 이모저모 준비하다가
동치미가 떠올랐어요.
국물 때문에 괜찮을지 걱정이 됐지만
몸에 좋기론 이게 또 으뜸인지라 보내기로 결심!
이중 삼중으로 꽁꽁 싸매서
택배상자에 조심스레 담았습니다.
맛보다는 정성만큼은 보장하는
밑반찬이 나름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동치미가 좋았나 봐요.
이거 하나만 놓고도 밥을 먹을 만큼
너무 잘 먹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통통하게 듬직한 동치미 항아리 앞에 큰절 올리고 싶을 만큼 고맙고 기뻤습니다.
겨우내 빠짐없이 산골밥상을 채운
동치미를 오늘도 입에 들입니다.
거의 끝물이라 국물이 좀 탁하고 알싸함은 덜해도
속을 후련하게 보듬는 건 여전하네요.
먹을 때마다 감탄이 나오니
요거 참, 대단하고 멋진 음식이에요.
(이런 김치를 만들어 낸 조상님들도 진심으로 존경하나이다~)
저녁상 치우고 마당을 잠시 나가니
어머나, 경칩도 아닌데 개구리가 우네요.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다렸던 새봄이
그예 오긴 오려나 봅니다.
조금 일찍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처럼
제 안에도 봄기운이 살랑거립니다.
살얼음 살강거리는 동치미를 맛볼 수 없어서 살짝 서운할 뻔했는데
뒤이어 찾아든 이 설렘이,
다가오는 봄이 참 좋고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