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대 입시 준비 과정
꿈을 향해, 과감히 사표를 던지다!
오늘은 제가 어떻게 통번역 세계에 입문하게 됐는지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합니다. 번역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인생 8할이 영어와 다름없는 저의 히스토리도 한 번쯤 정리해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네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입시 학원으로 직진한 이야기, 만삭의 임신부가 통대 면접 본 경험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지금 시작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3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둘의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죠. 당시 남편도 저도 야근이 너무 많아 평일 데이트는 감히 엄두도 못 냈습니다. 결혼 후에도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없겠다 싶어 남편은 제가 가정생활을 무난히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길 원했습니다. 올레!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그동안 속으로만 품고 있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단 1%의 미련도 없이, 저는 결혼을 6개월 앞두고 공식적인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통대 입시학원의 양대 산맥이었던 강남의 E 어학원에 등록해 입시생 생활을 시작했죠. 제 나이 스물아홉, 30대를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나이가 참 많게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창창한 나이였네요. 10년 후 마흔 아홉의 제가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들겠죠?
그렇게 퇴사를 결정하고 통번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사표 수리 전, 반차를 내고 학원에 청강을 갔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선생님이 뉴스를 한참 동안 틀어주셨는데 연이어 수강생들이 너도 나도 손을 들더라고요. 그러더니 선생님께 지목당한 한 분이 거침없이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수업이 순차 통역반이었던 것이죠. 제 멘탈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래, 한 번 해보자!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제게는 넘사벽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통대생이었던 친구의 조언을 받아 그 학원의 Y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죠. 그리고 며칠의 고민 끝에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통대는 11월이 입시철인데 그때가 6월이었으니 올해는 연습 삼아 시험을 보고 내년 합격을 최종 목표로 삼고 미친 듯이 달려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입시생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제 인생에서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해본 건 고3 입시 때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아침 먹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저녁때까지 학원에서 자습과 스터디를 병행했습니다. 점심은 주로 삼각김밥, 토스트로 해결했죠. 그날그날 수업 내용을 모두 내 것으로 소화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통대 입시는 스터디원을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한데 다행히 성실하고 좋은 분들을 만나 즐겁게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해 입시에서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예상된 결과였죠. 어차피 제 목표는 내년이었으니 동요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말보다 글이 좋았고 스피킹보다는 라이팅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는 H대였지만 번역 전공이 따로 있는 E대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시를 준비하던 바로 그해부터 H대에서 번역 전공 인원을 별도로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렇게 제 목표는 <H대 통번역대학원 한영번역과 입학>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통역보다는 번역 쪽에 치중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술면접은 영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통역도 완전히 놓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번역에 포커스가 맞춰지니 공부하기가 훨씬 재미있고 수월했습니다. 역시 자신 있는 분야를 좀 더 파고드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입시 중에 찾아 온 아기천사
어느덧 입시를 준비한지도 1년 남짓, 그 와중에 제게 또 하나의 이벤트가 생겼습니다. 결혼 8개월 만에 지금의 큰아이가 엄마 뱃속에 찾아와주었죠.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저의 '따불' 입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태교를 영어 공부로 한 셈이죠. 입덧이 좀 있긴 했지만 몸 상태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어서 집과 학원을 오가는 뺑뺑이 생활은 변함없이 이어나갔습니다.
어느덧 11월 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1차 지필 고사를 보던, 코끝 시린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시험장으로 향하던 제게 시어머니께서 안수 기도해주시던 기억까지도. 다행히 시험 문제는 제가 준비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비교적 차분히 풀고 나왔습니다. 뱃속의 꼬물이도 잘 있어 주었고요. 시험 내내 밖에서 기다려준 남편과 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1차는 합격! 이후부터 2차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번역학과를 통역학과와 분리 선발하는 두 번째 해였기 때문에 영어 인터뷰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도 잘 몰랐고요. 더구나 임신 6개월 차라 배가 꽤 부른 상태였습니다.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최대한 마음을 편히 먹고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준비했던 질문들이 주로 나와서 별문제 없이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결과 발표만 남은 상황이었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지난 1년 반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습니다. 다만, 후년 3월이 출산 예정이었으므로 그해에 합격하지 못하면 다시 공부할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렇게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통대 합격, 그 후...
두구두구- 합격자 발표 결과를 확인하던 그날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발표 시간에 맞춰 학교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길 수십 번. 드디어 공지가 떴고, 제 이름 석 자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 그토록 염원하던 통대생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출산 때문에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해야 했지만,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렇게 합격증을 받아든 날로부터 올해가 꼭 10년이 됩니다. 저와 함께 뱃속에서 입시를 치렀던 우리 큰애는 어느덧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둘째도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고요. 저는 8년 차 번역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육아와 병행할 목적으로 택한 직업이라 처음부터 인하우스로 취직하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고요. 졸업 직후부터 지금까지 죽 아이들 곁에서 '짬짬이' 일하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지난 10년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네요. 앞으로의 10년은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고요. 올해는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큼 열심히 키워보려 합니다. 번역가로서의 제 삶과 엄마표 영어를 진행하며 겪는 소소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여러분과 마음껏 소통하고 싶네요. 함께 해 주실 거죠?!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