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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Nov 25. 2021

11월

학살자가 죽은 날이었다. 전세자금대출 연장이 안된다는 전화를 받았다. “저희도 처음 있는 일이라서요.” 은행의 담당자는 그렇게 말했다. 저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담당자는, 임차인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대안을 몇 개 말해주었다. “제가 처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그 불가능의 틈새를 어떻게 파고들어서 어떤 환멸을 딛고 처리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심지어 온전히 처리되지도 않았다. 서울의 빌라 임대인이 공시지가의 어디까지 전세금을 올려 받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이건 그냥 11월에 대한 이야기다.


겨울이 싫어서 11월이 싫어졌는지, 11월이 싫어서 겨울이 싫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11월은 내게 언제나 한겨울인 12월이나 1월보다 추운 달이었다. 기억하는 한 그랬다. 심각한 수족냉증이 있는데도 양말을 잘 신지 않고 장갑을 끼지 않으며, 기온과 계절과 몸상태에 맞추어 옷을 입는 기본적인 일에 꾸준히 실패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겨울 난방을 아끼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애초에 난방이 잘 안 되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선후관계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11월과 꾸준히 불화해왔다는 사실, 11월에는 늘 좋지 않은 일이 생겼고 그게 이 달을 징그럽게 싫어하는 내가 불러온 불운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11월과 나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런데도 이 달에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치지 않아서 가을에 좋은 것을 볼 때마다 11월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괜찮을 것이다.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걸 먹자. 수영을 했고, 친구들의 생일 파티 겸 경주 여행을 다녀왔고, 이 여행은 2020년 이후로 수도권 밖에서 처음으로 1박 이상을 보낸 여행이었으며, 여행 중에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 수영 말고 다른 운동은 할 시간이 없었고, 여행 때를 제외하면 다른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고, 집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결국은 쌤쌤이라고 생각했는데, 몸과 마음은 더 오래 머무는 시간 쪽으로 기울어서 11월의 불운을 착실히 적립했다.


한밤에 응급실을 가야 할까 고민할 정도로 발꿈치를 심하게 다쳤고(피가  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다),  군데의 병원에  일이 생겼다(보통은  군데다). 기록해두고 싶을 정도로 심한 PMS 시달렸으며(생리통과 배란통도 심각했다), 2 가까이 함께 지낸 고무나무와 호야가 죽었고(몬스테라도 반쯤 죽었지만 인정하지 않고있다), 거실 한쪽 벽의 콘센트가 통째로 나갔으며(아직 해결하지 않았다), 중급에  수는 없고 초급에 마냥 있기도 미묘한 수영실력이 퇴보를 거듭하던  강사가 이직 소식을 알리는 바람에 나의 레벨과 애정은 더욱 애매해졌다. 마지막 사건은 불운인가? 모르겠다.


그럴 수 있지. 아마 발꿈치를 다치고 며칠 뒤였던 것 같다.  겨울이 찾아오면 설치의 귀찮은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커튼 레일의 S핀 하나하나에 달아둔 트리 베일 전구에 전원을 넣어줄 타이밍이라고 느꼈다. 반짝이는 것이 필요하다. 새 멀티탭을 연장해서 전원을 넣고 스위치를 누르자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대략 5분 정도. 어딘가 끊어졌는지 조명이 꺼졌고, 다시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홈웨어로 주문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구멍이 나서 온다든가, 꽉 채우지도 않은 쓰레기 봉지의 옆구리가 터지면서 전날 먹은 인스턴트 굴라쉬 스프의 고추기름이 하필이면 여행지에서 새로 산 흰색 니트에 튄다든가 하는 일은 불운 축에도 끼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발꿈치를 다친 것도, 종이에 베인 것도 다 내가 부주의하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라 벌어진 일이다. 늦잠을 자서 시사에 가지 못하는 게 불운이 아니듯이, 마감을 못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불운이 아니듯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은 부동산과 주민센터 사이를 한 시간 동안 세 번 왕복해야 하는 것, 은행의 담당자가 하필이면 오늘 휴가를 간 것, 나에게 돈도 시간도 없는 것. 그래, 그럴 수 있지.


부동산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일찍 일어난 덕에 강북 지역에서 상영 중인 유일한 극장에서 딱 한 회차 상영하는 <틱틱붐>을 보았다. 수영을 하는 작가인 내가 수영을 하는 뮤지컬 작가의 이야기를 보며 운다. 그렇다. 나는 뻔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야?” 조나단 라슨, 이 나이브한 백인 남자 같으니. 그래 놓고 나 역시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좋은 것들을. 친구 아들의 돌 선물로 보낸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맨투맨 티셔츠, 친구가 추천해준 맛있다는 디카페인 원두, 지난 여행에서 찍은 네 컷 사진, ‘광고를 축하합니다’라는 댓글, 내 바라클라바를 놀리다가 2020년 생 아가들에게 선물로 곰돌이 귀가 달린 바라클라바를 사준 친구의 마음, 발꿈치를 다친 다음날 친구가 보내준 구급상자, 255개의 좌석 중 내 자리가 있는 토요일, <틱틱붐> 첫 넘버인 '30/90'의 한국어 가사가 ‘멈춰라 시간아’로 시작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  조카들이 대여해준 벨루가 인형의 이름은 벨벨이인데 다음에 조카들을 만나면 벨벨이와 교환해 새로 대여할 인형의 이름은 미미라는 것을.


학살자의 미납 추징금은 9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일십백천만… 하며 세어보니 열 한 자리 숫자다. 오늘 오랜만에 통장에서  다섯 자리 숫자를 보았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발꿈치를 다친 지 꼭 보름이 지났고, 신발을 신으면서 더 이상 진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흔적을 남기고 아문 상처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종종 흔적을, 흉터를 더듬지만, 결국 아문다는 것을 안다. 수없이 다치며 배운 것이므로 부끄럽지 않다. 크리스마스가 한 달 남았고, 11월은 닷새 남았다. 크리스마스가 한 달 남았다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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