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거울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치밀하게 설계된 빈틈이 많은 리얼리티다. 빈틈까지 설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빈틈은 할 말을 만들어낸다. 누구든 이 프로그램을 보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누가 싫거나 좋다는 이야기이든, 어떤 지점이 불편하거나 어렵다는 것이든, 특정 설계의 부분이 이상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든, 또 어떤 부분은 아주 흥미롭다는 이야기든 할 말은 아주 많다. 그걸 나눌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게 당연하다. 이는 리얼리티나 서바이벌 예능의 특성이기도 한데, <더 커뮤니티>는 그 차이가 더 클 것 같다. 타이틀의 ‘사상검증’ 속 사상이 어느 정도 공유된 타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는 가정 아래, 정치 성향, 젠더 관점, 성장 배경의 계급, 문화에 대한 개방성의 정도가 같고 또 다른 타인과의 대화를 끌어내는 리얼리티라니. 이 대화에서 ‘나’를 이야기하지 않을 방도는 없다. 공동체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는 할 일을 다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나도 내 얘기를 해야겠다. 자신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해 경험을 꺼내왔던 9회의 낭자처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컨디션이 나쁠 때만 꿈을 꾸기 때문에 좋은 꿈을 꾸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꼭 악몽은 아닌 게, 내가 꾸는 꿈은 굳이 분류하자면 개꿈에 가깝기 때문이다. 맥락도 서사도 개연성도 없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꿈에서 보면 개꿈에서 악몽으로 역할이 변한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상황이 악몽인 경우는 딱 하나다. 대학교 2학년 여름. 그때 살았던 집의 내 방에 누워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느낌이 들어 잠이 들고 가위에 눌린다. 자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되면 폰을 들고 학교의 성적확인창에 접속한다. 접속이 되지 않는다. 하얀 화면을 보며 입술을 물어뜯는다. 곧 알바를 가야 한다. 알바를 가기 전에 성적장학금 결과를 알고 싶다. 문득 깨닫는다. 이거 꿈인가? 가위에 눌려있나? 다시 깨어난다. 다시 그 방, 그 여름이다. 성적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자고 깨고가 계속 반복된다. <인셉션> 같은 거네. 근데 내가 <인셉션>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 여름에 <인셉션>은 없는 영화였을텐데? 그렇게 다시 꿈인가? 하면 그 방. 누가 이 도돌이표를 끊어줬으면 싶을 때쯤 그 방이 아닌 곳에서 깨어난다.
지겨워. 겨우 장학금이 뭐라고. 야, 그거 못 받아도 살아. 20대 초반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못 살았을 수도 있겠지. 내가 장학금을 타면 아빠가 내 이름으로 학자금을 대출해 자기 사업 자금을 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사업이 수익을 낸 적도 없는데 망하고, 차압 예고장이 오고, 알바를 최소 세 개 정도 하던 시절의 일이므로. 누군가 내게 “야, 그거 못 받아도 살아”라고 말했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따귀를 올려붙였을지도. 성격이 지금보다 더 급하고 더럽던 때다. 요새는 그 꿈을 꾸는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거기서 멀리 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의 장점과 한계가 모두 명확히 드러나는 회차인 5회에서 출연자들은 빈곤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놀랄 정도로 흥미롭고 문제적인 세팅을 해 놓은 제작진이지만 토론 주제만큼은 시종일관 실망스럽다. ‘빈곤의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주제를 두고 계급, 세습, 개인의 노력, 사회구조 같은 단어로 여섯 멤버가 토론을 이어가는 사이, 작가이자 전 여성단체 활동가인 하마는 채팅창을 닫아버린다. “이걸 하나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하지?” 그 사이, 특수부대 출신의 다크나이트는 토론 중이다. 그는 빈곤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쪽이다. “저는 정말 혹독하게 노력했고 다른 분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힘들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두 사람 모두, <더 커뮤니티>의 사상 분류 기준 아래서 ‘W-서민’이다.
토론 명제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하마가 쓴) 익명의 글이 올라온 뒤, 유튜버 테드는 개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빈곤에서 자수성가까지 가본 사람이 있나?” 가장 불편함을 두려워하는 출연자의 이 순수한 의문이, 나는 더 불편했다. 현재 빈곤한 사람이 출연자 중에 있을 리 없다는 것. 이는 추측이 아니다. 토론이 시작되기 전,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연봉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5천만 원 이하 연봉자는 1명, 그리고 3억 이상의 연봉자가 1명. 절반의 출연자가 5천만 원에서 1억 사이의 연봉을 받으며, 5명은 1억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30대 후반 중위소득이 월평균 325만 원임을 고려하면, 이들 중 중간 소득 이하의 청년의 현재를 계급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는 의미가 된다. 사상표에서 서민 계급이라고 분류되었다 해도, 과거형이다. <더 커뮤니티>가 사회 설계와 그 빈틈으로 보여주는 아주 많은 것들 중, 내게 가장 흥미롭고 의미 있게 다가온 지점은 이 부분이었다. 거기 ‘지금’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한계이며, 방송의 한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8회 하마의 탈락은 필연적인 동시에 치명적이다. 나와 완벽히 동일한, 극단적이라고 표현되는 점수를 가진 그가, 계급을 제외한 나머지 사상의 방향이 같은데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있는지도 모르는 40대 남자 출연자 그레이의 공격으로 커뮤니티를 떠나야 했을 때, 나는 마이클처럼 외쳤다.
“이게 현실이에요!”
슈퍼맨을 필두로 한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꽤 많은 수는 개인이 자신의 생존과 안위, 재산을 최우선에 두는 것은 당연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위선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더 커뮤니티>에서는 의외로 돈이 힘을 쓰지 못한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이 리얼리티가 상금의 획득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커뮤니티>를 흥미롭고 문제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커뮤니티’의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 할 얘기는 아니다) 출연자들 개인의 연봉 수준을 생각할 때 획득할 수 있는 상금이 절실한 개인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랍게도 상금에 가장 큰 집착을 보이는 건 연봉 상위권으로 추측되는 회사원 지니이다) 그렇다면 생존-안전의 문제가 남는데, 여기서도 타인과 함께 살기를 바라거나 상대적인 약자와도 계속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는 태도는 위선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서바이벌 공식에 익숙한 출연자들이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한국어는 잘 못하지만 사자성어를 즐겨 쓰는 래퍼 마이클 식으로 표현하자면 적자생존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아비규환이 된다는 것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생존 서바이벌(한국살이로도 번역 가능하다)에 익숙한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의 태도를 위선이라고 말할 때, 이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생각에 균열을 내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 하마가 있다.
커뮤니티의 나날을 살며 하마의 입장은 동일하다. 최대한 모두가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약한 사람을 돕고 되도록이면 부를 분배하자는 것이다. 사람이 모였으니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게 서바이벌의 목표이고 인간은 결국엔 이기적인 존재라는 명제가 진실인 듯 통용될 때, 하마는 보통 질문을 한다. 숫자 말고 다른 걸 보면 안 될까요? 연봉 3억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마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마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선을 따라가는 것은 흉내에 불과하므로 이 모든 것은 위선인가? 가진 것을 타인과 나누는 일에 기꺼운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가? 내가 부자가 되기보다는 같이 적당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왜? 세상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생각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전 세계의 후플푸프에게 복이 있을지니, 누군가는 그게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누군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원해서 그렇게 한다. 누군가-아마도 커뮤니티의 테드와 같은 사람-는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게 한다. 같이 사는 것, 더 약한 사람에게 더 나누는 것,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특별히 대단하거나 의도를 가진 선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의 사상이 알려주는 바와 상관없이,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와도 상관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선택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설계 안에서, 하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은 다크나이트이다. 우파, 반 페미니스트(난 이퀄리즘이라는 단어를 쓸 생각이 없다), 소수자에게 비관용적인 서민이며 특수부대 군인 출신의 출연자다. 인간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한다는 편견을 다크나이트가 깨 주는 순간 역시, <더 커뮤니티>의 변곡점을 만든다.
그는 가진 돈도 적은데 공격받기 쉬운 점수를 가지고 있어 불안해하던 하마에게 선뜻 자기 몫의 100만 원을 준다. 다크나이트는 자기편을 만드는 행위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냥 선의였다. 하마가 탈락하게 되었을 때, 다크나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라면 면제권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줬을 거라고 말한다면 믿을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는 줬을 것이다. 그 또한 엄청 숭고한 일이라서, 착한 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닐 테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 계급을 제외하고 사상 세 개가 일치하는 그레이와 계급만 일치하는 다크나이트 중에 누가 믿을만한, 누가 이 사회에 시민으로서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인가? 눈앞에서 보여주지 않았다면 하지 않을 고민을 <더 커뮤니티>에 비추어 해본다면, 막연한 추측과는 다른 답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래서 <더 커뮤니티>에서 가장 정치적인 순간은 알파벳 네 개로 보여줄 수 없는 복잡한 개인을, 편견을 넘어서며 보여주는 순간이다. 다크나이트가 하마에게 준 100만 원, 리더가 인간의 쓸모와 역할로 목숨을 저울질할 때 사람의 목숨이 쓸모로 판단되어야 하느냐고 묻는 슈가의 질문. 이런 ‘인간다운’ 순간의 누적이 영리한 두뇌로 부캐놀이를 하고, 어딜 가도 정치질을 안 할 수 없으며, 내 이기적인 선택에 타인을 동참하게 만들어 수치를 나눠가지려는 일부가 만드는 뻔한 ‘캐릭터’들보다 몇 배는 흥미롭다.
약속된 탈락 면제권을 내놓은 사람이 없어 결국 커뮤니티를 떠나게 된 하마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전에 탈락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벗어던진 위선이 나에게는 품위라고. 서바이벌에서는 본 적 없는 캐릭터겠지만, 한국 사회에 같이 사는 시민으로서는 그 누구보다 미덥다. 좌파 페미니스트, 소수자에 개방적인 시각을 가진 서민. 이 사상검증으로 요약되지 않는 복잡한 인간의 품위가 만들어낸 하이라이트를 남기고 하마는 떠났다. 떠나며 하마는 이런 말을 남긴다.
“(사람들은) 그냥 보고 싶은 어떤 면들을 그냥 자기를 비춰보겠구나.”
그러니까 이 글 역시도 <더 커뮤니티>를 보고 내가 보고 싶은 어떤 것들을 비춰본 것이다. 내가 비춰본 거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더 나빠지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미래에 산다.
개발과 성장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에 살았다.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현실의 혜택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다. 정체와 후진, 퇴보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가난을 겪어본 사람은 미래에 살아본 사람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에 가까워지고, 삶에 주어질 불편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할 것이므로.
제가 또 계급 얘기를 하고 있나요? 어쩔 수 없다. 나는 연봉 5천만 원은커녕 월세만큼도 안 되는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그럼에도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서민이기 때문이다. 난 연봉 3억이 부럽지 않다. 그 정도의 연봉을 받는 이들은 높은 세율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세금은 등록금을 댈 수 없는 서민 학생을 위한 장학금, 장애인을 위한 공공시설물 건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와 빈곤 계층의 구제에 쓰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그리고 그들이 자수성가의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다면, 이전보더 더 나은 일상이 주어졌을 때 이 모든 게 더 혹독하게 노력하고 애쓴 댓가라고 확신하지 않을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야말로 내가 겪어본 미래를 타인이, 다음 세대가 덜 겪기를 바라는 마음을 현실에서 보여줄 수 있을테니까. 자수성가의 신화와 각자도생의 현실 인식에서 한 발자국만 걸어 나올 수 있다면, 사회 전체는 아니더라도 사회 일부의 도움이, 어떤 개인의 선의와 돌봄이, 가난까지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회의 궁핍이 자신의 부가 되는 일부 특권층이 존재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면, 행동할 수 있다면. 더 나빠지는 세상에서 더 나은 미래를 선취할 자격은 그들에게 있다.
나는 경제적인 궁핍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시절을 평생의 악몽으로 꾸는 사람이 나 정도면 좋겠다.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주 많은 이들에겐 지금의 현실이며, 내게도 다시 도래할 수 있는 미래인 것을 안다. 비록 하마는 떠났지만, 이걸 아는 사람들이 같이 살아갈 방법을 끝내 찾으면 좋겠다. 이제 2회를 남긴 <더 커뮤니티>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복잡한 인간들이 치열하게 고민해 만들어낸 문명사회라고 알려줄 수 있다면, 이 문제작은 내게 올해의 예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