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우리는 뉴욕, 워싱턴하이츠에서 만났다.
뉴욕 변호사 미셸박, '뉴욕박변'을 만나다
'날씬하지 않다. 마흔, 그리고 미혼이다.'
이 세 가지 팩트를 듣고 뉴욕박변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를 걱정한다. 아이고, 어떡해. 그녀는 그런 시선을 알고 있다. 활발하게 유튜브와 SNS 등을 시작했지만 얼굴이 노출되는 건 조금 꺼린다. 왜요? 라고 물으니 '뚱땡아입닥쳐' 라는 댓글이 달릴 것만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무례하고 천박한 댓글이 달릴지라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것들을 가뿐히 무시하고 그녀 자신을 격하게 사랑해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만난 그녀는 웃을 때 동그래지는 볼이 아름다웠고 긴 머리를 넘기는 손이 귀여웠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온 흔적이 그녀의 온몸에 남아있었다. 좋은 마음을 쌓아온 사람에겐 하찮고 사소한 마음들이 머물 공간이 없다. 얼굴에 인생이 담긴다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나의 마흔 얼굴이 미울 것 같아 불안해서다) 그녀의 얼굴엔 잘 살아온 인생이 담겨있었다.
여름같은 봄날,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래 전 헤어진, 한때 많이 사랑했다던 연인과 처음 만났다는 맨해튼 워싱턴 하이츠에서 우리도 만났다. 날이 좋은 일요일 아침에 그녀가 우리 집 앞에서 차를 주차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도
우와, 벤츠네요?
미셸박
아 이거 완전 오래된 고물차예요.
박도
벤츠 이즈 벤츠!
우리의 대화는 브런치라는 말처럼 가볍고도 경쾌하게 시작되었다.
10년 차 뉴욕 변호사, 미셸의 이야기
박도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한국에서 20대를 보냈다가 30대부터 다시 미국에서 살고 계시죠.
미셸박
중학교때부터 막연히 미국에 오고 싶어서 ‘유학을 가야하는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부모님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어요.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고 계셔서 형편이 좀 괜찮았죠. 그렇게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일을 하다가, 미국 대학원에 합격했어요.
가고 싶었던 곳이라 기쁘고 설렜죠. 그런데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뺑소니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었어요.
아 어떡하지? 뭐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10년이 흘렀더라고요.
그때부터 장녀로서 아버지 병원비를 대고 동생들 학비를 벌어야 했어요. 일주일에 병원비가 1,500만원까지 나오기도 했어요.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든다는 말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나더라고요.
박도
어떻게 갑자기 한국에 와서 그 돈을 혼자 다 감당하셨어요. 고작 스물셋, 넷, 많이 어렸잖아요.
미셸박
마침, 대학원 때문에 봤던 GRE점수가 있어서 어학원에서 GRE, SAT강사로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딱 1년만 하면 기적처럼 아버지가 깨어나실줄 알았죠. 뭐. 그런데 병원에 계신지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주중에는 학원에서 수업하고, 주말에는 병원에서 밤을 세웠어요.
박도
…
아.. 참..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아.. 죄송해요. 너무 좀 마음이. 제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한동안 침묵 후) 대체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낸 거예요..
미셸박
아, 괜찮아요. 이제 많이 지난 일이니까. 그땐 주말에 막차타고 내려와 병원으로 퇴근하고 밤에는 아버지 소변 받아드리고, 아버지께서 외출이 가능하셨을 때는 하루 집에 모시고 와 목욕 시켜드리고, 그렇게 살았어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살아주기만 바라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점점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많이 울었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왜 나한테, 우리 가족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도저히. 뺑소니 치고 도망간 누군가는 어디선가 잘 살텐데. 그 사람은, 아버지 사고 후 우리 가족의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바뀐걸 알기는 할까 원망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었고, 내가 유학가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그 때까지 일을 안하지 않았을까, 그럼 그 날 사고도 나지 않았을까, 그런 죄책감에도 오래 시달렸어요.
박도
그렇게 10년 후에야, 다시 뉴욕에 오셨어요. 미셸에게 큰 의미였을 것 같아요.
내가 이러려고 기를 쓰고 미국에 갔나? 난 꿈이 있는데.. 내 20대가 이렇게 다 가버리는 건가?
미셸박
계속해서 꿈을 잊지 않았어요. 상황이 상상도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시간도 그렇게나 많이 지나버렸지만 그건 저에게 포기가 아니라 ‘연기’였거든요. 언제가 되든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미국에 오게 되었을때는 꿈이 10년 미뤄진 거니까, 이제 다시 내 삶의 진로를 찾는 여정이라는 생각에 걱정보다는 잘 해낼거라는 마음이 더 컸었던 거 같아요. 그 사고로 인해 대견하게 잘 견뎌내 왔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못 해낼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 때만 해도, 세상에 겁날 것이 없었어요.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대출을 받았어도, 변호사가 되고 나면 열심히 일해서 갚을 거니까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만 해도, 내 학자금에 적용될 복리이자의 힘을 과소평가 했던거죠. 알았더라도 결국 했겠지만요(웃음)
뉴욕에는 사랑이 있다
박도
아. 미셸은 이젠 웃으면서 좀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면 듣는 입장에선 그 모든 이야기들이 갑자기, 훅 무겁게 들어와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위로도, 공감도 할 수 없어서,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양해를 구할게요. 집에 가서 그 인생을 곱씹다보면 아마도 눈물 날 것 같아요. (나는 미셸을 안아주거나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미셸박
작가님은 사람의 입을 열게 하네요. 무장해제 시킨다고 해야하나요. 길고 긴 연애사까지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박도
제가 그게 유일한 장점이라고나 할까요.(ㅎㅎ)
미셸박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남자를 만나도 다 맞춰주고 잘해주려고 했죠. ‘이런 하찮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무조건 내가 잘해야지’ 한 거죠. 바보였죠.
박도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극복중인 부분이긴 해요. 미셸은 어떻게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나요?
미셸박
글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자신에 걸려 넘어지는데요. (웃음)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혼자 오피스에 있는 커다란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숨 죽이고 운 적도 많이 있어요.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스스로를 몰아부친 적도 많고요. 힘들어 할 때, 영국에 사는 친동생에게 전화가 왔어요.
“언니, 스스로에게 너무 매몰찬 거 아니야? 만일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언니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겠어? 언니, 이렇게 생각해봐. 미국인이 고1에 중국에 유학가서, 중국 법원에서, 중국인 변호사에 맞서, 중국어로 재판을 한다고… 언니는 정말 잘 하고 있어.”
그렇게 위로를 건네주더라고요. 그때 전화 끊고 많이 울었어요.
그 후부터는 ‘내 동생이 나에게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전화했다면, 동생에게 어떤 말을 해 줬을까?’하고 생각하면서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박도
남에게는 친절하게 말하면서 자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게 채찍질이라기 보다는 그게 되려 남에게 받은 것보다 더 상처가 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내가 나를 다치게 하면서 자존감이 말도 못하게 바닥을 치니까요.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나를 대해주는 것, 그거 정말 따뜻한 방법인 것 같아요.
미셸박
네. 제가 고1때 유학을 왔는데, 저보다 영어로 말도 더 잘하고, 영어로 글도 잘 쓰는 변호사들이 얼마나 많겠냐고요. 그것도, 뉴욕에서요. 영어로 재판을 해서 상대를 이겨야 하는데, 내 모자름이 혹시라도 사건에 영향을 미칠까봐, 다른 건 못해도 오랫동안 엉덩이 힘으로 버텼어요.
무슨 일이든 준비 과정이 철저하면, 떠는 것도 줄고요. 그렇게 해서 조금씩 노력이 결과로 돌아올 때, 조금씩 마음도 자존감도 회복이 되었던 것 같아요.
박도
사랑도 자존감에 영향을 주잖아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것 둘 다요.
미셸박
뉴욕에서 살면서 저와 피부색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른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한 번도 내 몸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나라에선 제 몸이 되게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아 이게 사랑받는 거구나.’
내가 예쁘고 소중해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마음이 처음이었어요. 그때 내 자신을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박도
그때가 30대 중반이었다고요. 20대가 아니어도 뜨겁게 멋지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저는 사실 뉴욕에서 언니들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서른이 넘으면 사랑을 못할 거고, 괜찮은 남자는 이미 다 결혼을 했으며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랑 빨리 결혼하는 게 평생 외롭지 않게 사는 거야’라는 사회가 떠드는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거든요.
미셸박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뉴욕 퀸즈에서 살 때도 그랬어요. 외국인이랑 사귄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 중엔 70년대, 80년대에 미국으로 넘어온 분들은 한국을 떠났을때의 보수적인 사고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고요. 한국은 변화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시대는 멈춰 있고, 사는 장소만 바뀐거죠.
뉴욕의 다양성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
박도
결국 직접 내가 부딪혀 경험해보는 것만이 유일한 답일 수도 있겠네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참고하거나 그냥 참고도 말고 흘려버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보면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 실제로 어떤지 알 수 있으니까요.
누구의 말이 아닌 나의 경험에서 좋든 나쁘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그게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거잖아요.
대학 시절에 ‘아프리칸 아메리칸 사회학’ 강의에서, 또 로스쿨에서 흑인 사회와 문화에 대해 알게 되셨죠? 흑인에 대한 수많은 편견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요.
미셸박
처음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준건 대학때, 흑인 사회학 (African-American Sociology) 수업이었는데, 주로 영화에서 보던 게으르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바람을 피우고, 공공자원에 기대어 사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완전히 깨는 기회였죠.
특히 로스쿨에서 만난 흑인 친구들- 사회가 부여한 온갖 스티그마를 이겨내고 거기까지 온 - 의 경우 누구보다 똑똑하고, 본인의 삶에 진심일 뿐 아니라, 자기가 살아낸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어린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멘토가 되기를 자처했어요.
그 친구들 중에는 살면서 한 번도 자기 방이 없어 부엌에서 매일 잤던 친구도 있었고, 엄마 혼자서 여러 아이를 기르느라 일을 할 수 없어 정부에서 주는 food stamp에 의존해 살아온 친구도 있었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 로스쿨에 갔을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줬던 친구들이 아마도 이런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자기 공부할 시간도 모자랐을 텐데, 언제든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친구들이었습니다.
박도
그래서 더욱 뉴욕에서 벌어지는 흑인에 대한,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계시죠.
미셸박
아무래도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편향된 이미지들이 그런 편견을 더 강화시키는 것 같아요. 대학을 나온 흑인들, 그 중에서도 전문직을 하고 있는 흑인들은 적은 편이니, 상대적으로 전문직 종사 비율이 높은 백인들이나 아시아인들에 비해 노력을 덜 한 건 맞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은, 미국에서의 criminal justice system은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죠. 흑인, 특히 흑인 남성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데 겪어야 하는 많은 불평등은 아시아 이민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에요.
실제로 저와 함께 로스쿨을 다녔고, 현재 워싱턴 DC에서 국선 형법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흑인 친구는 첫 재판에서, 증인이 그 친구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범인입니다!”라고 지목하는 바람에, 첫 재판을 이기게 된 웃픈 얘기도 있죠.
최근 <Just Mercey>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한 ‘Equal Justice Initiative’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브라이언 스티븐슨 변호사도 비슷한 경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미국 연방 대법원에 사건이 있어 법정에 들어가자, 판사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나가서 기다려. 변호사 오면 같이 들어와”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요. 하버드 법대 출신인 브라이언은 자기가 변호하고 있는 사건이 잘못될까봐 화를 내지는 못하고 침착하게 웃으며 자신이 변호사라고 설명했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최고의 학벌, 명품 양복, 직업, 그 어느 것도 ‘흑인’이라는 피부 색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바꾸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봅니다.
제가 로스쿨 3학년때 1년간 국선 변호사들과 함께 일하며 본 사실은, 흑인이면 같은 범죄 혐의로도 체포 당하는 확률이 훨씬 높고, 한 번 체포가 된 기록이 있으면 계속 잡혀올 확률은 더더욱 높고, 그러다 보면 흑인 거주자가 많은 동네의 경우에는 심하면, 가정이 있는 남자들 반 이상이 감옥에 가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면 아빠를 잃은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갱단에 가입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갱단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죠. 엄마들은 아이들을 혼자 두고 오랜 시간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거나, 공공자원에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시스템적인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흑인들은 게으르고 위험하다라는 편견은 편협하고 잘못 되었다고 봐요.
최근에도, 조지 플로이드가 대낮에 백인 경찰에게 태연하게 살인을 당한 후, 그 모습이 찍힌 영상이 공개되자, 전국적으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는데요. 시위 중에, 흑인들이 몰려와서 가게를 털어갔다는 한인 사장님들의 글이 올라왔어요. 댓글 중에는 ‘역시 흑인들은…’ 식의 댓글이 꽤 많이 보였는데요. 단골 흑인 손님들이 와서 가게를 지켜 주었다는 내용은 주목을 받지 못했죠. 사실 알고 보면,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소수 민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역사는 비슷했고, 함께 연대해야 인종차별이라는 깊이 뿌리 밖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디서 시작할지 모르겠다면, <Just Mercy>라는 영화와 2017년에 25년전 LA폭동(이라고 당시에 기사화 되었던)을 기억하기 위한 일환으로 National Geography에서 만들 1.5짜리 다큐멘터리인 <LA 92>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도
정말요. 몰랐어요. 겉에 보이는 것만, 귀에 들리는 것만 알면 안되겠네요. 같은 영어를 쓰는데도 백인들이 흑인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또 같은 맨해튼인데도 백인들이 사는 동네와 흑인들이 사는 동네가 나뉘는 것도 마치 나라가 분리돼 있는 것처럼 선명해서 놀랐던 생각이 나네요.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다양한 인종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은데요. (왜 늘 연애와 사랑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는 걸까요?ㅎㅎ)
I don’t care who you are, where you’re from, what you did, as long as you love me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서 왔던, 무슨 일을 했던, 나를 사랑하는 한 상관 없어요
미셸박
뉴욕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만나기 힘들었을, 다양한 인종, 종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삶이 풍성해졌죠. 데이트를 하면서, 내가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가 원하는 관계는 어떤 것인지, 나는 어떨 때 행복해하고, 어떨 때 상처 받는지, 그리고 나에게 없는 부분을 보면서, 배워가는 과정도 즐겁고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결국엔 그 사람의 알멩이를 발견하면서 사랑한다는 건 같지 않을까요?
박도
그쵸. 피부색이 같고 언어가 같다고해서 잘 맞는 건 아니니까요. 아, 출산하고 싶은 마음? 그건 뭔가요.
미셸박
결혼 하고 싶다, 이런 건 없어요. 워낙 워커홀릭이기도 하고 욕심이 많아서 결혼함으로써 주어지는 의무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거든요. 그런데 출산에 대해서는 요즘 고민이 돼요. 내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생물학적으로 더는 안 되는 나이를 앞두고 있어요.
지금보다도 30대 후반에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막연히 언젠가는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살겠지 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 버렸으니까요. (웃음) 그때는 초조한 마음에, Fertility Test 도 받아보고, 냉동 난자도 알아보고, 심지어 사귀었던 남자친구들 중 누가 좋은 아빠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고, 하루에도 수천 번 생각이 왔다 갔다 했죠. 미국에서 냉동 난자의 비용을 알아보니, 나이 때문에 3만불 정도라고 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하려면 적어도 3주는 한국에 있어야 했는데 당시 스케쥴로는 불가능해서 포기했었죠.
어떤 사람들은 아직은 가능하니까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낳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나요. 사실 만나던 분 중에는 이런 이유로 헤어진 경우도 있었어요. 지금은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입양에 대한 생각도 항상 가지고 있기는 했고요.
뉴욕 변호사는 미드처럼 일하나요?
박도
<슈츠>, <금발이 너무해>, <굿와이프> 등 영화나 미드로 접한 미국 변호사의 삶은 너무 멋있잖아요. 실제로는 6분 단위로 일하신다고요? (실화인가요)
미셸박
시간이 곧 돈이라는 말을 이렇게 실감하면서 삽니다. 내 삶을 6분 단위로 쪼개어 업무를 기록하는 일은 ‘내 시간’에 대한 관점을 많이 바꿔 놓았어요. 6분 단위로 쪼개어, 어떤 서류 몇 장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분석했는지를 꼼꼼히 기록하는데만 해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고객의 입장에서는 변호사가 어떤 일을, 얼마나, 왜 했는지 알 권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로펌마다, billable hours (고객에게 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시간)를 정해놓은 경우가 많은데, 전에 다니던 로펌은 일년에 2100시간, 한 달에 175시간, 하루에 8.75시간이었죠. 그런데 여기에는, 예전에 리뷰했던 서류를 다시 보는 시간, 재판 서류 챙기는 시간, 윗 사람과의 전략 회의 시간 등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제가 실제로 일했던 시간은 매일 13시간 이상이었어요.
만일 제 기록을 보고 고객 입장에서 과잉 청구라고 생각이 들면, 연관된 서류를 첨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 달라는 요청이 오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시간은 billing hours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아예 제가 처음 청구할 때 제 시간을 항상 깎아서 기록하고는 했어요. 그러니 이 시간을 메꾸려고, 주말에도 항상 일에 매달렸죠.
여기에 파트너로 승진을 하고 싶다면, 틈틈이 관련 글도 작성하고, 강의도 하고, 실적도 올려야 하는데, 이 시간들은 non-billable hours라고 하는, 고객에게 청구할 수 없는 시간들이죠. 어떤 해에는 이 시간만 1,000시간이 넘었었죠.
제가 다닌 로펌은 800명의 넘는 변호사들이 경쟁하는 치열한 곳이었어요. 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니까 저도 그래야 하는 거라고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죠.
박도
와, 피가 말리고 숨이 막히네요. 고객사면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일텐데 한 푼도 허투루 안 주려고 되게 디테일하게 따지네요. 그 일지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변호사가 또 따로 있을 정도라니 이 정도면 진짜 화장실에서도 변호해야하는 거 아니냐며...
미셸박
최근에 5년 넘게 일했던 로펌을 퇴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어요. 3달 연속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새벽 2-3시에 퇴근을 했었어요. 결국 응급실에 반나절 입원하고 수술까지 했는데요, 그때 입원비용만 $5,000불이었어요. 이것도 보험 처리 후 비용이라지요.
그리고 퇴사하기 얼마전에는, 통증이 너무 심해, 수술을 앞두고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거든요. 상사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오더라고요. 뭐였는지 아세요? 10건의 업무에 대한 독촉 이메일..
그만두기 직전에는 4일 밤을 세워서 일했는데 돌아오는 말이 “여기 너 만큼 열심히 일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능력이 안 된다면, 보고 할 테니 당장 얘기해!”라는 식의 협박 전화가 연속으로 오더라고요. 제가 버티기는 잘 하는 편인데 ‘아 이제는 그만둬야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죠.
슈퍼마켓 냉장고에 들어가서 콜라병을 정리하는 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는 단 하루도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만 더 버티면 파트너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미련도 내려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만 두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달 간 휴식을 가졌어요.
박도
10년 차 뉴욕 변호사의 삶이라, 제가 (미드로) 알던 것과 너무 다른데요. (미드를 쉽게 믿는 편입니다만)
미셸박
예전에는 변호사 10년차면 눈 감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요. 특히 얼마 전,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면서, 매일이 다시 로스쿨 과정 같다고 해야할까요. 실력 있는 동료들이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질 때, 어버버 안 하려고 매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박도
미셸이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이유가 궁금해요. 인생의 목적이 뭐예요? 어떻게 살고 싶어요?
미셸박
쓸모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마음이 힘든 날에는 스스로 물어요.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무슨 일을 더 안 한 걸 후회할까?” 라고.
일중독에 가까운 삶을 오랜 기간 동안 살다 보면, 그게 다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기울어졌던 삶의 방향을 다시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역량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지만, 내가 바라는 역량을 다 갖출 때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요즘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교육 불평등인데요. 유튜브나 브런치,블로그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요. 누군가 제 글이나 영상을 보고 도움을 받았다는 글을 보면, 제가 더 큰 행복을 누립니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는데, 하나는 정말 필요한 곳에 학교를 설립하는 것, 또 하나는 아버지 이름으로 장학금 재단을 만들어, 부모님의 교통사고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박도
굉장히 이상적이고 아름다워요. 실제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잖아요. 영어 교육 콘텐츠나 멘토링 콘텐츠도 유용하게 잘 보고 있거든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거라고.
미셸박
사실, 누군가를 돕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 만족이라고 생각해요.그렇게 했을 때, 내 마음이 행복하니까요.
얼마 전, 누군가 제게 지금까지 맡아온 사건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건이 무엇인지를 물어봤거든요.
저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어요.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온 11살 아이를 7년만에 미국에서 생모와 만나게 해 주고, 그 아이가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을 주었던 일이라고 말이죠.
남미에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니, 자식이라도 살려보겠다고, 어린 아이만 브로커를 통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오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국경에서 잡히면, 이민 재판을 통해 다시 본국으로 추방당하죠. 이 중에는 3살짜리, 4살짜리 아이들도 있어요. 재판이 뭔지도 모르는 이 아이들의 80% 이상이 변호사 없이 재판 후 다시 본국으로 넘겨집니다.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사람이 가난할 경우, 국가에서 변호사에게 돈을 주며 그 사람에게도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미국이지만, 이민법에 대해서는 단호하죠. 이민재판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없어요.
이 외에도 서류미비자들은 강간범이며, 범죄자들이고,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이 있는데요, 불법체류자의 50%-75%가 연방 세금, 주 세금, 지역 세금을 다 내고 있으며, 이들이 Social Security에 내는 세금만 따져도 매년 7천억불 이상이거든요.
포괄적인 이민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죠. 그러려면, 이민자들의 정치력이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투표권이 있는 이민자들부터 열심히 정치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우리 사회에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도 힘을 보탤 수 있는 곳이 너무나 많다는 거죠. 주변에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박도
노력하면 정말로 될까요?
미셸
그럼요. 100%! 노력이 재능을 이긴다고 믿습니다. 머리 좋은 친구는 꾸준히 하는 친구를 이기지 못해요. 재능이 있는데 노력까지 한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내공’이라는 게 쌓이거든요. 다만, 열심히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하던, 목표와 전략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동료 변호사들을 보면, 좋은 학교 나온 친구들이 제일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학교 나온 친구들은 대부분 남다른 노력을 했더라고요. 대형로펌에 취직하고, 제일 처음에 하버드 로스쿨 나온 친구랑 일을 같이 했어요. 변호사 시험에서 2개 주의 시험을 한꺼번에 치르는 경우, 3일동안 8시간씩 시험을 보는데, 이 친구 말이, 화장실을 가는 시간이 아까워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시험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잘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생각하지 못 한 부분까지 평소에도 노력을 했기 때문에 잘 하는 거라고요.
왜 우리는 뉴욕에서 꿈을 꾸는가?
박도
하필 뉴욕에 온 이유가 있으세요?
미셸
로스쿨에 가기 전에 뉴욕에 고등학교 후배가 리만 브라더스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친구가 티켓을 사줘서 Museum of Modern Art (MOMA)에 갔었어요. 그때 모네의 그림 앞에서 30분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엉뚱하지만, 그 그림이 큰 위로가 되었고, 그 그림을 언제든 볼 수 있다면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어요. 그 후, 다시 뉴욕을 왔을 때, 콜롬비아 로스쿨에서 헌법 수업을 청강했고 그 때 로스쿨을 오기로 결심을 했었죠.
박도
미셸에게 뉴욕은 어떤 곳인가요.
미셸박
뉴욕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도시죠. 지하철 표를 살 때도, 한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등 여러 언어로 표시해야 한다는 법이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정부에서 보내주는 안내서도 한국어로 신청할 수 있으니, 나이가 있으신 어르신들도 무슨 내용이 왔는지 이해할 수 있고요. 아예 한국어로 안 보내줬다고 항의 하시기도 해요 (웃음) 물론 이렇게까지 된 데는 ‘민권센터’를 비롯한 여러 한인 단체들과 스텝들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박도
뉴욕은 그런 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아요.
미셸박
한국 사회에서는 물론 많이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해진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대학은 어디를 나와야 하고, 취업은 어디에 해야 하고, 결혼은 언제까지 해야 하고, 아이는 몇 있어야 하고, 몸무게는 어느정도 나가야 하고….
뉴욕은 그런 면에서 훨씬 자유롭다고 느껴요. 사회적 기준의 장벽도 훨씬 덜 하다고 느껴요. 인종도, 배경도, 문화도, 교육 환경도, 가정 환경도, 성정체성도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Norm’이라는 것 자체를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거 아닐까요? 오히려 그런 기준을 남에게 적용하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쉬운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박도
미셸은 어떻게 살고 싶어요? 어떤 삶을 꿈꾸나요?
미셸박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꼰대처럼 나이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면서, 즐겁고 행복하게요. 너무 욕심 많나요?
우리가 만난지 몇 개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또 봄같은 어느 여름날에 뉴욕의 파트너스 카페에 앉아 그녀를 떠올렸다. 이 글을 편집하며 그녀와 브런치를 함께한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왜 그렇게 뉴욕이 좋으냐고 묻는다. 당분간 나는 미셸박 때문에 뉴욕이 좋다고 말할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받은 위로처럼 누군가에게도 그녀의 이야기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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