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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ter Lieberman Jan 06. 2022

우주의 한 점에서

신해철이 말했다, 여러분은 이미 태어난 것으로 삶의 목적을 다 완수한 것이라고. 가장 어려운 목적을 이미 완수한 여러분이 사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렇다. 이 세상에 가장 희박한 가능성 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나란 사람이 존재할 확률이다. 허블 망원경이 처음 우주 공간에 띄워졌을때, 과학자들은 인류의 역사적 기록이 될, 허블 망원경의 첫 미션으로 무엇을 찍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수많은 행성과 빛나는 물체들 가운데 그들이 고심끝에 내린 결정은 놀랍게도 무작위의 검은 공간을 찍는 것이었다. 티끌같이 작은 어둠의 한 점을 잡아 집중적으로 망원경을 통해 빛을 흡수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그들은 더 놀라운 발견을 하게된다. 그 무작위의 작은 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계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광대한 검은 공간은 무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영원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시공간에 생명이란 것이 태동하게 되고, 또다시 영겁의 시간이 흘러 나란 존재가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다못해 짧디 짧은 인류의 역사만 보더라도 조상 중 한 명만 병에 걸려서, 다쳐서, 싸워서, 굶어 죽어서, 혹은 그냥 너무 못생겨서, 그 밖에 수많은 이유로 자손을 번식하지 못했다면, 나란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자주 회자되는 수억계의 정자 간 경쟁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마져도 과소 평가되어있다. 한 번의 사정 당 수억 대 일인진데, 한 사람이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정을 하는가. 아! 허망하게 사라져간 수천억의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이 말도 안되는 확률에 비하면 나란 인간이 태어나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우주의 먼지만도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내가 애쓰고 노력한 일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닐까.


이 영원한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노라면, 난 가끔 더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된다. 과연 생명이란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귀하다는 것과 동의어라 될 순 없다.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일 지언정 우린 모두 어차피 사라지고 잊혀질 존재들이다. 태양도 수명이 있다던데, 언젠간 인류도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주의 한 작은 검은 점에서조차 보이지 않게, 빠르고 조용하게, 있었는 지도 없었는 지도 모르게.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배웠지만, 그 하찮음에 난 가끔 존재의 가치를 회의한다.


삶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는다한들 그것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오직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뿐 이라고 말하던, 내가 좋아하던 신해철은 허망하게 수술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충분히 행복했을까. 아니면 부족했다고 느꼈을까.


이렇게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죽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가끔은 확신에 차 있다가도, 어느새 다시 회의할 것이고, 찰나의 행복은 금새 불행으로 바뀌어 잊혀져 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난,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이 생을 마감할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살면서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아무 것도 모르기에 아무 것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삶은 고귀하지도 하찮지도 않다. 그저 모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점에도 우주가 담겨있듯, 아무것도 아닌  같은 삶의  순간에도  우주가 담겨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좌절스럽지만은 않다. 아무 것도 모르기에 어딘가 설레는 구석이 있다.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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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by 에릭 와이너를 읽고 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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