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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Feb 26. 2024

삶의 밀도

근로소득 상위 1% 커리어 우먼 VS 구직 급여도 끊긴 공식 백수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간다고 한다. 20대, 30대 할 때 앞에 붙는 숫자가 그 나이대 세월의 속도라는 비유는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유머같지만 고작(?) 35세의 나도 공감하는 쉬운 진리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건 삶의 밀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릴수록 세상은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우리의 하루가 익숙해지는 만큼 시간의 속도는 빨라지고 밀도는 느슨해진다. 다만 요즘 느끼는 건 세월의 속도가 반드시 나이에 연동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던 1년 전과 구직 급여도 끊긴 생산성 제로 '0' 상태 공식 백수인 현재. 그 삶의 밀도가 지금이 더 높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꼬마 때 세상은 온통 알록달록 빛나고 있어서 나는 서른한가지 맛 아이스크림 고르는 마음으로 모두 맛보고 싶었다. 맛으로 표현하자면 새콤함을 중심으로 톡톡 튀는 신나는 맛. 생일과 소풍, 시험과 같은 별거 아닌 이벤트로도 흔히 찾아오는 두근거림 때문에 꼬마의 1년은 늘 풍성했다.

반면 학생 시절은 딱딱하고 어두운 세상에 돌기 같은 나를 느껴야 했다. 구체화되는 자아와 세상과의 충돌을 다루기 위해 세상과 나를 탐구하고 다듬어가며 제법 묵직해진 쓴맛과 고통을 마주해갔다. 꼬마 때와 다른 결이었지만 학생 때까지만 해도 세월은 내 삶을 구석구석을 사려 깊게 훑으며 흘러갔다.

 

내가 세월의 찬바람을 느끼게 된 건 20대 후반 회사를 입사하고 어느 쯤이었던 것 같다. 입사 후 프로젝트를 하나 배정받아 마무리하면 3-4개월이 지나 있었다. 2월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_새싹이 나고, 개학을 하고, 벚꽃축제를 하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지나_어느덧 반팔을 꺼내 입어야 하는 초여름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면 한 해가 지나있었다.

그동안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하고 출근했으며, 하루의 업무 계획을 세우고, 미팅을 하고,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쓰고 등등 업무 후 퇴근을 했다. 완료되는 프로젝트 개수만큼 커리어가 쌓이고 점차 연봉도 높아졌다. 바쁜 와중에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해외여행도 가고, 필요한 날엔 적절히 효도도 하고 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세월이 나를 맞이하는 온도가 전과 다름을 느낀 것이다.


'후루룩-' 또는 '쒸이잉-' 쯤으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이 표현이 성의 없고 다소 차갑게 느껴진다면 내가 맞는 표현을 찾아 쓴 것이다. 그때쯤부터 세월은 내가 미처 세상의 빛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삶을 통과했다. 때론 다정하게 때론 아프게 내 삶 곳곳을 짚던 세월의 짙고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세월이 나이 든 나를 홀대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다만 나는 당시 주관적으로도 객관적로도 몹시 바쁜 상태라고 인정할 만했고 그것만으로 나는 나의 무죄를 주장하고 싶었다. 내 삶을 위해 더 이상 어떤 최선을 더할 수 있겠는가. 바쁜 일상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말이다. 내가 인정받고 박수받는 삶 속에서 나는 세상과 내 삶을 씹고 뜯고 맛보지 못했다. 세월도 나를 본체만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현재 나의 하루를 읊어보자면,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구수한 커피향을 맡으며 모닝커피를 내린다. 컬리에서 주문한 도톰한 도제식빵을 토스트기에 구워 과일과 함께 곁들인 아침을 먹는다. 1년쯤 백수로 지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아침 메뉴 스타일을 찾게 됐다.

운동은 계절에 따라 요가, 헬스, 클라이밍, 등산 골고루 땡기는 걸로 한다. 건강을 위해서 꾸준히 하려 노력하지만 귀찮아서 안 할 때도 많다. 그래도 운동을 하면서 내 몸속 근육의 존재와 움직임을 느끼는 건 재밌다. 등산도 처음엔 '회사도 때려치웠는데 이것도 포기할 순 없지'하며 오기로 했지만 지금은 산마다 계절마다 품고 있는 매력을 하나 둘 찾을 줄 알게 되었다. 정상의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내 가슴 깊숙이 가득 채워 내려온다.  

무수한 업무 처리로 언제나 과부하 상태였던 뇌는 요새 거진 절전 모드에 있다. 꾸준한 관심사인 심리학, 철학 책을 볼 때나 일시적으로 켜지는 수준이다. 그래도 심리학과 철학을 통해 내가 힘들었던 이유를 이해해나가고 있다. 굳이 따지자며 난 스토아학파와 쇼펜하우어 철학을 기반으로 나를 이해하고 있다.(허세이다. 잘 모른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돌본다. 세상살이에 바빠 세월이 슝슝 지나갈 때 뚫린 구멍을 채운다. 아직 솜씨가 미숙하지만 천천히 하나씩 채우고 있다. 완전한 백수의 삶이지만 이전보다 삶의 밀도가 높아졌다 느낀다. 세월이 나의 몸과 삶을 조금 더 감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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