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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밤의 새벽별 Jun 15. 2021

투명배낭

  

여행자는 오늘도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별다른 짐없이 주머니가 많은 조끼 하나만 걸친 채 가벼운 몸으로 자유롭게 걸어다닌다. 어디서든 먹을만한 열매, 풀, 뿌리 같은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화가 통하는 동물을 만나 음식을 얻어먹게 될 때도 많다. 반달가슴곰을 만나 햐얀 반달무늬를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두 고개 너머 산에 사는 아주 예쁜 암컷 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들고 있던 꿀을 한 움큼 나눠주었다. 산양 무리와 암벽타기 경주를 하고 산양유를 얻기도 한다. 아주 당연하게도 매번 그가 내기 경주에서 지고 주머니에 있던 열매 몇 알을 주게 되지만 착한 산양들은 즐거웠다며 젖을 조금씩 내어준다. 마을을 통과하거나 길 가는 사람을 만날 때면 다른 여행지에서 구한 작은 물건이나 신기한 여행담을 들려주고 음식이나 모자, 옷가지를 얻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쉽게 지치게 되었다. 긴 여행길에 체력이 축난 건가 싶어 전보다 자주 쉬고 든든히 먹고 잠도 길게 자고 있지만 나날이 더 힘들기만 하다. 완만한 숲길을 걷고 있는데도 마치 험준한 산을 오르듯 힘들어하던 그는 작은 연못 같은 계곡을 발견하자마자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발을 담갔다. 시원한 감각이 점차 시리게 느껴질 무렵 두 발을 꺼내 들었다. 방향을 살짝 비틀어 마른 바위에 다리를 쭉 펴고 두 손은 등 뒤로 받친 채 비스듬히 앉았다. 화창한 날이었다. 맑고 파란 하늘 바탕에 나뭇잎들이 살랑거린다.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연둣빛 잎사귀들이 싱그럽다. 흐르는 물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에 몸도 마음도 청량하고 편안하다. 햇볕이 데운 바위가 따뜻하다. 한참을 그렇게 쉬다가 고개를 돌려 계곡물을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하늘과 나무들. 그런데 물에 비친 자신은 뭔가 이상했다. 커다란 배낭을 등에 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등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계곡물에 비친 자신을 보니 여전히 커다란 배낭을 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어깨와 등에 손을 대보니 가방이 느껴져서 냅다 벗어던졌다. 정말로 배낭이었다. 몸에서 떨어지자 물에 비춰보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이 요술쟁이 같은 배낭을 대체 언제부터 메고 있었던 것일까. 배낭을 열어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돌 조각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하나씩 꺼내 보았다. 크기는 모두 비슷한데 무게는 다 달랐다. 주로 밝은색을 지닌 것들은 가벼웠고 색이 진할수록 무거웠다. 만지면 제각기 작은 메아리같은 소리가 울렸다. 귀에 대고 가만히 듣다보면... 어쩐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모양은 하나같이 언젠가 그가 만난 적 있는 것들과 닮은 듯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는 빛깔이 예쁘고 가벼운 조각상 몇 개만 배낭에 넣어서 매어보았다. 아주 가뿐했다. 배낭도 쓸모가 있고 골라 넣은 돌조각들도 마음에 들기에 가지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메는 순간 투명해지는 배낭을 메고 여행자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배낭을 메고 가기로 마음먹은 진짜 이유를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그의 몸은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배낭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가 가방을 벗어 던졌을 때 순간적으로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허공에 떨어지는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비록 무게가 늘어갈수록 힘들어지긴 했으나 배낭을 멨을 때 느껴지는 은근한 안정감이 아쉽고 그리웠다.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 마음 한 조각이 그를 설득했다. 배낭이 쓸모 있을 거라고, 몇몇 조각들은 예쁘고 가벼우니 지닐만하다고 잘 포장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배낭에 각인된 강화마법을 작동시켰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한 번 투명화가 풀렸다 돌아오면 배낭에 걸린 마법은 강력하게 증폭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 배낭을 벗고 싶어도 벗지 못한 채 그는 서서히 그것의 존재를 잊게 될 것이다. 지금은 가뿐하지만, 배낭 안에는 저절로 돌조각들이 하나둘 들어와 쌓여갈 것이고 그 무게에 다시금 지쳐갈 것이다.


  그가 내린 결정이 어떤 운명을 불러올지 알지 못한 채, 아직 몸도 마음도 가벼운 여행자는 해맑다. 해질녘에 만난 라마 가족을 정성스레 빗질해주고 나온 털들 덕분에 오늘 밤 잠자리는 좀 더 포근하다.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잠자리가 포근하게 느껴지지 못할 만큼 배낭의 무게가 존재를 짓누르게 될 운명도 함께 잠들어있다. 배낭 속에 잠들어있었던 슈퍼 강화마법만이 비밀스럽게 깨어있는 밤이다. 언젠가 그 슈퍼 강화마법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이 그의 마음속에 홀연히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일말의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마침내 그 배낭을 완전히 내려놓게 될 것이다.





[꼬리말]

  투명 배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여러 색상의 돌조각상들에 관해서는 자연마법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들이 조금 남아있다. 조각상의 원재료인 돌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응축감정 이론’과 ‘감정 화석화 이론’이 학계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상념에너지 고체화 이론’도 최근 주목을 받는 가설이다. 돌조각상을 만졌을 때 울리는 소리에 관해서는 암호화되어 저장된 문장일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들이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여 목록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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