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고 May 03. 2021

나는 호구가 아닙니다만, 호구인지도 모릅니다.

구직자는 원래 호구입니다. 흑흑

이곳 저곳 다양한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9to6를 제외하니 생각보다 넣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와중에 글 쓰는 일이 생각보다 그렇게 적지 않았고,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부분 프리랜서를 구하는 일이 많아 선택의 폭이 그렇게 좁지 않았다. 블로그 포스팅이나 광고를 작성하는 일들을 제외하고 어느정도 내 이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의 이력서를 위주로 찾아봤다. 건수로 금액을 책정하여 지급하는 곳도 꽤 있었다. 아이를 보며 일거리를 찾는 내게 제격이라 생각했다.


나는 되도록이면 기사글을 비롯한 비문학 위주의 글쓰기가 그나마 내가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관련한 곳을 이곳 저곳 기웃댔다. 그러다 한 곳을 찾았다. 기업의 인터뷰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내가 직접 취재를 가는 건 아니지만 지금도 뜨문뜨문 인터뷰 기사는 작성하고 있고, 오히려 내가 직접 취재를 가서 기사를 작성하게 되면 글의 흐름이나 구조를 먼저 정하고 글감을 구할 수 있으니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해당 기업도 꾸준하게 일할 사람을 구하기는 하나 거의 알바개념의 프리랜서를 구하는 거라서 부담이 덜했다.


연락이 안 올줄 알았는데 의외로 연락이 빠르게 왔다. 대략적인 기업의 정보와 어떤 기업을 상대로 인터뷰 기사를 쓸 것인지에 대한 메일이었다. 당장 채용하는 건 아니고, 일정 기간동안 교정교열을 비롯한 테스트와 기사작성 테스트를 거쳐 채용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확인 즉시 오케이라 답장을 보냈다. 그 때는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 분명 그날이 주말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메일이 온 것에 대해 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덜덜덜


그리고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 여전히 새벽 6시에 기상하는 봄이 덕에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메일함을 확인했다. 어제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온 답장이 있었다. 첨부파일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메일을 눌렀다. 원래 이런 메일은 당장 일을 하기 직전이나 일을 할 수 있을 때 확인하는 편인데, OK 메일만 보냈지 테스트 일정이나 장소 등도 모르는 상황이라 내가 일할 곳이라는 생각이 덜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그 메일을 클릭했다.


맙소사.

메일 내용이 대단했다. 월요일 오전 시간을 줄 테니 당장 교정교열을 해서 답장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발신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2시 37분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척추뼈가 탁탁탁 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당 기사는 인턴기자가 초안을 작성한 기사였다. 내용을 보니 당장 대충 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다. 일단 닫았다. 나는 당장 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남편의 밥도 차려야 하는 주부라는 일차적 직업을 가진 여성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했다. 내가 아침에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일을 맡기지? 것도 내가 가능하다, 아니다 일정 조율도 전혀 없이 갑작스럽게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일감을 보내 놓은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면 말지, 라는 생각으로 모든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장 우리가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어제 정리하지 못한 설거지를 마무리, 빨래까지 개킨 뒤에야 컴퓨터 앞에 앉았다. 11시였다. 한 시간이 남았다.


나는 내 글도 교정교열을 안 하는 편인데. 초딩 꼬꼬맹이들 빨간 펜으로 찍찍 그어 준 적이나 있지, 너무 오랜만에 글을 고치려니 어느 수준으로 해야할 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이 기사가 전부이고, 이 글의 문장이나 문맥을 내 생각대로 고치면 원래 작성한 기자분의 기분이 심히 나쁠 것 같았다. 게다가 테스트라며. 당장 실릴 기사를 보내면 어떡해. 그래서 윤문 과정은 생략했다. 전문적인 기업의 이야기가 바탕이기도 하고, 문장을 재배열할 시간도 모자랐다. 한 시간이다. 그냥 비문을 수정하고 긴 문장을 짧게 고치는 수준으로 보내고 말았다.


안 되면 말지. 아니 무슨 새벽에 이런 메일을 보내 놓는 담. 아직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를 비롯해서 여기서 일하면 왠지 뭐 될거 같은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답 메일은 오지 않았다. 역시나 까였군, 하는 생각에 반쯤 시무룩해지고 반쯤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또 메일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에 온 메일의 제목을 확인했지만, 굳이 누르지 않았다. 어제와 같이 찝찝한 느낌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때 확인하겠다는 심정으로 미뤘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당장 며칠에 인터뷰 취재 참가가 가능하겠냐는 문자였다. 얼었다. 공포였다.


저기.. 저 아직 테스트 통과도 안 하고 기사 작성 시험도 아직 안 봤는데요. 저 아직 무슨 일 하는 지도 모르는데요. 저 아직 거기 사람 아닌데요. 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저 아직.. 저 아직.. 저 아직...!!!!!!!!!!!


답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해 일단 답장을 보냈다. 당장 바쁜 일이 있어 통화가 어렵고, 해당 날짜가 괜찮은지는 나도 확인해야 한다고. 메일을 아직 확인하지 못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건지도 파악이 안 되니, 조금 이따 연라을 주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메일함을 들어가보니 5통에 가까운 메일이 와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앞으로의 내가 그려졌다. 매번 이렇게 메일을 받고 두근대겠지. 예상하지 못한 메일들에 허우적대면서도 해야한다고 압박을 받으며 쩔쩔매겠지. 너무 놀라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니, 몇억을 주면(..) 그러면 가란다. 그거 아니면 가지 말란다. 왜 그런 데를 가서 개고생을 하려는 거냔다. 물론 나는 알바처럼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이게 과연 알바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기쁘게 작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매일 새벽에 와 있는 메일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안돼. 안돼.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확인하고 답장하고 있었다. 궁금한 걸 질문하고 매일매일 꼬박꼬박 오는 질문에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한 자리 한 자리가 아쉬웠다. 며칠을 아무 연락이 없어 고생하고 나니 이렇게 고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 이런 것도 못 참으면 되겠어? 하는 생각이 왜 들었나 몰라. 나는 아직 채용 된 것도 아니고 책임도 주어진 게 없으며 심지어 정확하게 그곳이 어딘지도, 무슨 일을 하는 지도 확실하게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상태로 생면부지 기업의 인터뷰를 가야한다는 압박이 너무 심했다.


그날 저녁 인터뷰 관련한 책을 두 권이나 사서 독파했다. 혼자서 가상 시뮬레이트를 돌려보고 기업에 대한 기사를 샅샅이 뒤졌다. 그 기업이 개발하고 있는 기술이나 동향을 찾고 논문까지 뒤졌다. 돌아보니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기뻐야 하는데, 이 일이 즐거워야 하는데 죽을 것 같았다. 아직 나는 채용된 것도 아니고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일정 조율 하나 없이 날아온 문자 하나에 쩔쩔 매는 내게 븅신같고 멍청이 같았다. 남편도 보더니 집어 치우란다. 인상을 팍 찌뿌렸다.


나도 내가 바보 멍청이 머저리라는 거 아는데.. 포기가 안 된다.. 포기가 안 돼..ㅠㅠ


그러다 갑자기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첫 시작이 설레는 문장이었다. 아직 구직을 하고 있냐는 내용의 문자였다. 내가 일 하려고 준비하면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뒤 늦게 연락이 왔다. 헛, 헛, 어떻게 된거지?



그 길로 읽고 있던 논문을 모두 닫았다. 메일함을 열었다. 아직도 읽지 않은 첨부파일 가득 메일을 하나 눌렀다. 보낸이의 메일을 클릭했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다른 기업의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인터뷰 참가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귀사의 창창한 앞날을 기원합니다."




아직도...

후렷하닷....

하앜하앜하앜하앜



매거진의 이전글 일희일비, 그거 안 하기 참 어렵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