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곳에서 인사 여쭙니다. 저는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미국 메릴랜드에 살고 있는 임수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책을 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 동안 책을 통해 선생님과 나눈 교감은 어쩌면 몇십년의 교감 그 이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나누고 싶어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저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감히 ‘디아스포라’라든가 ‘소수자’라고 저를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불과 13년전에 미국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선생님이 일생 느끼셨을 그런 차별이나 불이익을 심각하게 당해본 적도 없고, 또한 그로 인한 고민이나 소수자로서의 아픔을 절절히 느껴본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남편이 영어 못하는 동양인 의사로서 차별을 당하고 아픔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긴 하였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소수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을 진짜 고통 앞에서 차마 ‘소수자’의 아픔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어가 나아지고 영주권을 받은 지금 그래도 많이 해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다만 이방인으로서 외국에 살면서 다수의 미국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조금 더 민감하게 바라보고 지켜보며 마음을 열고 정신을 열고 사회를 느낀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처음 제가 접한 선생님의 책은 <디아스포라의 눈>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책에 실린 선생님의 칼럼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했고, 내가 외면했던 세상을 또 한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알 수 있었는데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리 하지 않은 문제들을 선생님의 글들을 통해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홀로코스트’나 ‘제노사이드’와 같은 주제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그 주제를 나름대로 홀로 파헤쳐보고 다양한 책들을 읽어왔습니다. 세상에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책을 읽고 읽어도 풀리지 않는 ‘도대체 왜!’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무엇을 위해서 인간은 이렇게까지 이르는 것인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에 수많은 사람들을 동조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 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들의 끝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였습니다. 프리모레비의 한국어판 번역 제목대로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제 안에 존재해 왔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생각해도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대답이기에 더욱 답답했고, 답답하기에 때론 질문하기를 유보하다가도 다시금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제 질문이 재일교포의 현실, 또한 세상의 무수한 부정과 모순까지 닿지 못했음을 인정하지만, 어쩌면 제 질문은 그 모든 마이너리티의 현실, 모든 세상의 차별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책에서 말씀하셨더군요.
<이토록 부당한 상황에 대해 이토록 당연한 주장을 하는데 왜 리버럴하고 양심적인 일본국민 다수는 침묵하고 늘 방관자로 머무는 걸까. 바로 그것이 내가 지난 20여 년간 끊임없이 던져온 의문이다. 나는 이제 슬슬 내 나이에 걸맞게 고독에 침잠하며 이런 글도 그만 쓰는 게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선생님이 짊어지고 계신 고통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저는 감히 질문했다고, 고민했다고 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질문과 의문의 무게 앞에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일생동안 느껴오셨을 부당함. 편견. 차별에 가득찬 환경. 그 앞에서 감히 제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이 말씀은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저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글을 쓸 때에는 열심히 쓰고 열심히 외치면 바뀌고 변화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기에, 계속 쓰고 계속 물을 수밖에 없다는 선생님의 외침. 그럼에도 ‘우리들 재일조선인은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아픔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상기시키는 ‘과거의 망령’이며 그 책임을 최후까지 지고 싶다’는 선생님의 자아정체성은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끝없이 질문을 하는 존재 그 자체이고 싶은 선생님의 의지를 느끼게 했습니다.
선생님의 책 몇권을 전자책으로 구해 읽은 후, 끝까지 읽지 않고 아껴두었던 책 한 권을 드디어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책입니다. 절판이 되어 해외배송 주문도 되지 않았기에 한국의 지인을 통해 중고책을 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꽤 상태가 좋은 중고책이 오래지 않아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접했지만 함부로 읽어나가지 못했습니다. 매일 조금씩 또리노 거리를 선생님과 함께 걷는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통스러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책이란 참 좋은 것이다.’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저는 이 책에서 모두 느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깊은 곳에서 생각했지만 나의 지성과 통찰력과 삶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표현할 수 없었던 모호한 것들을 문장으로 날카롭게 표현해 주신 선생님의 표현들. 비록 고통의 표현일지라도 저는 그 지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과 저와 쁘리모레비의 생각과 감정이 연결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이란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을 느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 그리고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에 깊이 몰입해 왔습니다. 당연히 쁘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그리고 ‘이것이 인간인가’는 제게도 중요한 작품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키워드는 ‘홀로코스트 관련 작품’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사라 로이 교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에세이도 간신히 찾아보았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없더군요) 로이교수가 이렇게 말한 부분 “내게 홀로코스트의 교훈이란 항상 특수한 (유대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문제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있었지요. 저 역시 언제나 ‘내게 홀로코스트의 교훈이 중요한 이유는 그 문제가 유대인과 나찌즘 사이의 특수한 문제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문제임’을 느꼈기 때문임을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 문제는 하나의 상징. 인간의 악과 차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면의 또다른 의미들을 이 책을 읽어가며, 저는 선생님과 함께 또리노 거리를 걸어가며,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나라는 존재는 ‘저편’과 ‘이편’이라는 두 가지로 정확히 분열되어 있었다. 나에게 ‘이편’의 세계는 값싼 모조품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저편’에 바로 인생의 진실이 있다. 나 자신도 ‘저편’으로 가야 한다… 당시 나는 쁘리모 레비의 말을 마치 성경구절이나 주문과 같이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적어도 ‘저편’에 대한 상상력만은 잃지 않으려고 늘 다짐하고 있었다.” 라고.
선생님께 있어서 ‘저편’이란 형님들이 살고 계셨던 감옥의 세계. 선생님이 ‘갈 수도 있었으나’ ‘단지 우연히’ ‘가지 않게 된’ 저쪽의 세계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선생님 또한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갈 수도 있었으나’ ‘우연히 가지 않은 길’ 즉 ‘재일조선인’이라는 길이라는, ‘저편’에 있는 분이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이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편에 있고, 저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편에 있는 모순된 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쁘리모 레비와 같은 삶에 관심을 놓칠 수 없는, 선생님보다 더 지독한 ‘저편’의 삶에 대한 상상을 놓칠 수 없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께 있어서 ‘쁘리모 레비’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은 <형님들과 선생님 자신과 세상의 모든 차별받는 자들과, 그리고 다시 그 정점에 있는 쁘리모 레비>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정을 받아들이는 저에겐 어떠했을까요? 저는 선생님의 여정을 멀리서 관조할 수 없었습니다.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쁘리모 레비’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행은 ‘나 임수진’이라는 사람이 ‘쁘리모 레비’를 만나는 과정이자 ‘서경식’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세상의 차별과 편견으로 인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해 고민하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지성인들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네 선생님. 저에게는 선생님처럼 고통을 받고 계신 가족도 없었고, 차별로 인한 고통의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부유하진 않아도 미국에서 의사의 아내로서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좋은 학군에서 아이들도 동양인으로서의 차별 같은 건 경험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축복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축복받지 않았기에’ 가져야 할 불운과 운명을, 제가 대신 ‘축복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이편’ 세계에 계신 것이 그저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셨듯이 말입니다)
때때로 저는 진공상태의 풍선 속에 홀로 둥둥 떠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2차대전은 지났고, 더이상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세상에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모순이 너무나 많고, 오늘도 지구 어디에선가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아름다운 미국 땅 어느 교외의 집에서 그림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감사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떠나지 않는 죄책감. 그리하여 저는 ‘저편에 대한 최소한의 상상력만은 잃지 않으려고’ 살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 마음 속의 의문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왜 ‘저편’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는가. 왜 나는 현실에 감사하면서도 늘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가. 나는 왜 쁘리모 레비의 책에 그토록 집착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질문들. 아.이런 마지막 질문은 도저히 정리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질문을 시대의 지성인이시자 온 몸으로 실제 아픔을 겪어오신 선생님께서 ‘대신’ 해 주시고, 대신 표현해 주신다는 것에 제 모든 질문들이 정리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서승 서준식 님 - 선생님 - 쁘리모 레비’로 이어지는 선상에 ‘서승 서준식 님 - 선생님 - 임수진 - 쁘리모 레비’를 걸쳐놓았습니다. 이 책의 여정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 책과 책의 여정이 어떤 의미였을지 선생님은 아실 것입니다.
“... 그것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형태로 유럽의 ‘안’을 향했고, 자신들의 이웃에게 미치게 되자, 비로소 ‘인간’이라는 이념의 보편성을 둘러싼 자기모순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도 기억해야 하지만, 그 이유 또한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구절구절에서, 행간에서 제가 느꼈던 것들과 선생님과 나누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이 편지에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생각들을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책이, 선생님의 ‘끝없는 질문’이, 세상을 향한 선생님의 ‘외침’이 결코 의미없지 않았다고, 저와 같은 무지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눈을 뜨게 하고 세상을 바로 바라보게 하고, 모지 못한 세상을 더 깊숙이 보게 하는 외침이고 질문이었다고. 선생님이 아무리 질문을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있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저같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고 분명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생님의 외침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저는 김훈 작가의 ‘하얼빈’을 읽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제국 건설’과 ‘조선침략’에 대한 진심을 보면서 ‘도덕적 성찰’이 없는 ‘진심’이란 얼마나 무서우며 무의미한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부디 일본의 가는 길이, 세상의 ‘평화’를 향한다는 그 길에, 세상의 모든 마이너리티와 디아스포라가 있는 곳을 향한 지도자의 길에 도덕적 성찰과 수치가 먼저 자리하기를 간절히 바라 봅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미국 메릴랜드에서 임수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