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호수 Apr 27. 2023

12. ADHD환자가 ADHD약을 먹는다는 것

참을 수 없는 ADHD약 먹기의 어려움

정신과 의사인 남편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 당신같은 환자만 있으면 세상에 의사들은 다 속터져 죽을 거야

- 당신한테 약을 먹이는 건 약 싫어하는 두 살짜리 꼬맹이한테 먹이는 것보다 더 고난이도야

- 내가 분명 일주일짜리 약통에 요일별로 다 넣어놨는데 도대체 왜 몽땅 그대로 있는거야!

- 대체 약을 먹고는 있는 거야?


아. 산너머 산.

모든 단계가 난관이다.

ADHD에겐.

아니 적어도 '나'에겐.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건의 일들을 처리하고, 메세지를 보내야 할 곳, 원고를 점검해야 할 일, 다른 사람의 글을 봐야 할 일, 줌미팅 약속 등등. 아주 많은 일들을 (나름) 잘 (내 기준) 처리한다. 물론 다 잘한다는 건 아니고, 꽤. 비교적. 대부분. 이라는 부사어가 숨어있다는 것은 독자가 이제 알고 읽어야 한다.

물론 나의 일상은 실수 투성이다. 어제는 집안을 잘 돌아다니다가 벽에 안경을 찧어서 안경의 콧대가 떨어져 나갔고(지금 콧날이 너무 아프다), 며칠 전엔 밤에 장보고 난 후 차에 고대로 넣어둔 채 들어와서 결국 다음날 다 버렸고(내용물이 무려 치즈, 햄, 요거트 이런 것들이었다), 또 며칠 전엔 아들이랑 도서관에 갔다가 내 차의 트렁크에 머리를 미친 듯이 세게 찧어서 뇌진탕에 걸린 줄 알았다. 아직까지도 머리는 부어있고, 콧날은 찣겨서 아프다.


나랑 제일 친한 옆집언니는 언젠가 술을 마시고 내게 전화를 해서 취중진담을 했다. 내가 애인도 아닌데 술까지 마시고나서 꼭 해야 했던 그 말.

"수진씨. 나 수진씨 정말 좋아하는데, 수진찌 진짜 ADHD같아!"

라고. 왜냐. 그날도 내가 대박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 그건 생략하자. 자꾸 자괴감 들려고 하니까. 아무튼 옆집언니와 나는 지금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말해둔다. 그건 나의 수많은 ADHD포인트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간에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좀 많이 샛길로 새긴 했지만, 나는 많은 일들을 잘 해나감과 동시에. at the same time. 또 많은 실수와 구멍을 매일같이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래 뭐 ADHD니까 그렇다고 이미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의사도 만나고 그래서 약도 탔다. 이게 중요하지 않은가. 진짜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숏액팅 약을 먹고 확실히 효과를 느꼈고, 그게 너무 짧은 듯해서 롱액팅 약까지 받았다. 물론 숏 액팅 약도 많이 먹은 건 아니다. 내 필요에 따라서 하나씩. 그조차 까먹어서 못 먹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다시 의사에게 말해서 하루 12시간 지속되는 롱 액팅 약을 받은게 약 5주 전쯤이다.


남편은 그 날 무척 흡족해했다. 드디어 이 사람에게 ADHD 롱 액팅 약을 먹이는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권해왔건만 정말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마치 자신이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 길에서 첫번째 도착지점 정도에는 잠시 들러 쉬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Sujin Lim'이라고 적힌 내 약통에 꽉 찬 ADHD약을 보면서 정말 그는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인생이 좀 편안해 질 거라고 착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무척 들뜬 표정으로 나의 일주일짜리 약통에 하나씩 약을 채워넣었다.


사람들은 머리도 좋지. 요즘 보면 갖은 종류의 약통이 다 나와서 나처럼 약 먹기 싫어하는 사람을 옥죈다. 요일별, 색깔별, 날짜별 아무튼 별의별 종류가 다 있다. 남편은 약 좋아하는 의사라 갖은 디자인의 약통을 다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작은 일곱개의 네모칸으로 나뉘고 SMTWTFS 라고 각 칸마다 적혀있는 앙증맞은 약통을 나를 위해 기증했다. 그리고 각 칸마다 나의  ADHD약 한개와, 비타민 D알약 한개를, 각각 두 개씩 집어넣었다. 나도 순간 살짝 기분이 들뜨긴 했다. 새로운 문구류를 가졌을 때처럼 투명한 약상자와 그 안에 들은 반짝이는 비타민 D 약은 뭔가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젠 정말 목적지에 거의 다 온 것이 아닌가.


1. ADHD를 의심한다.

2. ADHD를 인정한다.

3. 의사와의 미팅을 잡는다.

4. 의사를 만난다.

5. 약을 처방받는다.

6. 약국에 가서 약을 타온다.

7. 다시 의사를 만나서 follow up을 하고 롱액팅약을 받는다.

8. 약을 타온다. (롱 액팅. 12시간)


이 여덟 단계를 거쳐오기까지 매 단계가 얼마나, 얼마나 지치고 지루하고 힘들었던가! 매 단계에서 손을 놔버리고 까먹기를 무한 반복. 줄 사이의 여백에 인고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괜찮았다. 별로 약에 대한 의지가 없었으니까. 아마도 남편에게 인고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8번까지 마침내 다다라서 약통에 약을 채운 이 순간이 얼마나 뿌듯할 것인가.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후 남편의 절망은 더욱 심해졌다. 왜냐. 여전히 나는 아침마다 약 먹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약을 먹기 싫다고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일은 꼭 먹어야지'라고 결심한 다음날에도 홀라당 까먹고 마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하지만. 그래서 약 타온지 무려 5주가 지났지만 나의 첫번째 일곱칸 짜리 약통은 전혀 리필이 필요하지 않다. 약 세 번정도 먹은 것 같다. 남편은 밤마다 약통을 보며 말한다.

- 또 안 먹었어!! 임수진!

그때서야 나는 비타민 D만 꺼내서 먹어버린다. 그 밤에 ADHD약을 먹을 필요는 없을 테니.

- 아. ADHD에게 약을 먹게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거기다가 똥고집까지 장착한 임수진에게 먹이는 건 최고 난이도다. 내 환자 중에 저런 환자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남편은 혼자 중얼대며 가버린다.


아. 나는 다시 깨닫는다.

약을 제대로 먹어서 ADHD가 일상생활에서 호전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정한 ADHD가 아니었네라.  

어린 나이에야 엄마가 아침마다 밥 옆에 놔주겠지만, 이제 그러기엔 너무 늙어버린 중년인데, 약 정도는 혼자 챙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롱액팅 약을 먹었던 서너번의 경험은 강렬하긴 했다. 다음번엔 그 얘길 풀어보겠다.

*아. 내일은 꼭 아침에 약을 먹겠다. 다시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어쩌면 내가 약을 제대로 못 먹는 이유는

1) ADHD 극상 난이도라서 약을 못 먹는 걸수도,

2) 그냥 먹기 싫어서 (무의식적으로) 안 먹는 걸 수도,

3) 챙겨주는 엄마랑 같이 안 살아서 그런 걸수도,

4) 남편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앞서 열한 편의, ADHD관련 글을 써오면서 나의 블로그친구이자 글친구 한 분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다. 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남편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0프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했다. 남편에게 이 글을 보여주며 진료를 권유했고, 다행히 남편분도 호기심 반, 인정 반으로 정신과 진료를 보게 되었다. 검사 후 'ADHD' 진단을 받고 약도 받아왔으며, 그 이후 꾸준히 복용 중이라 하셨다. 약간의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꽤 약의 효과가 좋고, 무.엇.보.다. 아내인 자신의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남편의 마음을 아주 깊이 이해해 주었다.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 (나) 우리 남편은 그러더라고요. 숏 액팅 약이 다 떨어지고, 다시 약을 받아오지 않는 두어달 동안 다시 자신의 삶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고.


그러자 그녀는 깔깔 (카톡상으로지만) 웃었다. 너무나 이해가 간다는 웃음이었다. 아. 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우리'로 묶여버린, 그녀의 남편과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