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이 더 심해 내가 더 심해
나 : 자타 공인 앤 전문가. 일평생 앤 1권 ~10권을 족히 50번 이상 읽음. 번역서별 역사와 문체상의 특징을 꿰고 있음. 참고로 1960년대 초판본 신지식 번역본 앤을 가장 좋아함. 블로그에 앤 시리즈 포스팅을 20편 이상 함. 검색어 유입도 앤 관련이 가장 많음. 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큼. 앤 이야기 뿐 아니라 앤 캐릭터 앤 굿즈 매우 좋아함.
남편 : 앤에 대해서는 ‘머리가 빨갛다’는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음. 와이프의 앤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길버트라는 착각을 하고 있음. (그러나 결정적으로 길버트는 풍성한 갈색머리숱을 지님) 볼티모어에 있는 대학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로 재직. ADHD 와이프 전문가
사실 우리의 어린 시절 만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들 재기발랄하고 천방지축 왈가닥인 경우가 많다. 중고등학교 시절 청순가련형의 하이틴 로맨스에 빠지기 전의 주인공들 말이다. 얌전하고 말없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우리의 주인공들은 주로 우당탕탕 요절복통 잊어버리고 욱하고 잘 당황하고 잘 후회하는 그녀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캔디나 앤 같은, 매력적인 그녀들! 그녀들에게 adhd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싶진 않지만 사실 살짝 의심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앤 1,2권의 의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앤은 몹시 수다스럽다. 남의 얘기를 듣지 않고 혼자 떠들다가 마리라에게 종종 혼나곤 한다.
화법이 굉장히 오바스럽고 과장되었다. 그렇다고 악의적인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 멋에 취해서 디테일이 추가될 때는 있다.
린드아주머니랑 처음 만났을 때 앤의 외모에 대해 품평하자, 대놓고 소리를 지르며 ‘아주머니가 제일 싫어요!’라고 말했다. 마리라가 다시 사과하게 했을 때는 오바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취해 연극하듯이 과장되게 사과하였다. 그런게 앤의 매력이기도 하다.
길버트를 처음 만난날, 빨간 머리를 놀리자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쳐서 석판이 둘로 깨졌다. (욱 하는 면이 있다)
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머리에 꽃으로 화관을 만든 뒤에 잊어버리고 교회에 갔다.
다이애나와 티파티를 하던 날, 쥬스인 줄 알고 포도주를 대접해서 다이애나가 취하게 했다. (마리라가 잘못 가르쳐 준 탓이기도 함)
목사님 부부를 대접하는 날, 설탕인 줄 알고 베이킹소다를 넣어서 케잌을 망쳤다.
방물장수를 만나서 머리가 까매지는 약인 줄 알고 염색약을 사서 염색하다가 머리가 초록색이 된 적이 있다.
다이애나의 친척아주머니 배리부인이 오셨을 때 손님방에서 주무시는 걸 모르고 둘이 달려가서 침대 위에 펄쩍 뛰었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다.
크면서 모든 게 조금씩 좋아진다.
퀸 학원에서 돌아온 후에도, 옆집 해리슨 씨네 소를 자기 소인줄 알고 판 적이 있다. (무척 자괴감에 빠짐)
그런데 앤은 침착할 때는 굉장히 침착하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 한다. 다이애나 동생 미니메이를 돌봐서 살려내기도 했다. 어릴 적 이야기를 봐도 수많은 쌍동이들을 잘 돌봄.
나 : 자 이상의 리스트를 볼 때, 앤을 adhd로 진단할 수 있을까요?
남편 : 여기에서 중요한 건, 어쩌다 한번의 실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충동성’과 ‘부주의성’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게 중요합니다. 작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앤이 adhd가 있는지 없는지 진단할 순 없지만, 위의 얘기를 들어보니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긴 합니다.
나 : 어떤 부분이죠?
남편 : 과다행동과 충동성입니다. 과다행동이란 ‘수다스러움’ ‘반복되는 충동적 행동’ 그리고 ‘부주의함’ 입니다.
나 : 그런데 저도 부주의하고 충동적일 때가 있지만 일상에서는 또 굉장히 집중을 잘 하는 면이 있듯이, 앤도 정말 성숙하고 어른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아주 똑똑한 소녀에요.
남편 : ADHD가 있다고 해서 삶의 모든 면에 다 어려움이 있는건 아니니까요.
나 : 그럼 앤에게는 adhd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남편 : 얘기를 듣고 보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나 : 그런데 앤은 공부욕심이 정말 많았습니다. 길버트를 못 이기면 몹시 분해했죠.
남편: adhd와 지능은 상관이 없으니까요.
나 : 만약에 앤이 adhd약을 먹었다면, 훨씬 더 삶의 질이 좋았을까요? 앤은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데요.
남편 : 앤이 adhd 진단을 받았다고 가정을 한다면, 또 치료를 잘 받았다고 가정을 한다면, 부주의한 실수가 줄어들고 덜 충동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지능력을 더 충분히 발휘했을 겁니다.
나 :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앤 캐릭터가 창조되지는 못했겠네요.
남편 : 그건 모르겠네요. 실수를 많이 해서 사랑스러운 건가요?(대화가 안통하는 이과적 사고)
나 : 앤이 이런 어이없는 실수들을 안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다가 말도 없다면, 과연 저 캐릭터를 누가 사랑해줄까요? 앤이 성인이 되면서 많이 차분해지고 말도 없어지면서 책에서 앤의 분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남편 :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 : 그런데, 왜 앤은 성인이 되면서 그런 충동성이 줄어들었을까요? 책에서 앤이 성인이 된 이후를 보면 정말 차분하거든요. 가끔씩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남편 : 학령기에 adhd진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유의한 adhd증상이 계속되는 경우가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어떤 이유로 증상이 많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과잉행동은 줄어들고 주의력결핍증상은 남아있는 경우가 많죠.
나 : 바로 저처럼 말이군요
남편 : 그렇습니다. 책에 다 나오지 않ㅇ더라도 앤도 아마 주의력결핍은 계속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 : 지금 작가가 살아있다면 과연 앤의 adhd를 인정했을까요?
남편 : 궁금하네요.
나 : 그런데 보통을 진단을 할때 이렇게 묘사된 것, history, 주변사람의 말, 이런것들을 알면 진단이 가능하잖아요? 왜 진단을 확실히 못한다는 거죠?
남편 : 종합을 해야죠. 하지만 환자 이야기를 직접 들은게 아니니까 진단을 내릴 순 없죠. 앤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나 : 종합을 해보자면, 앤은 adhd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앤을 만나기 전에는 (말하자면 작가와 얘기해 보기 전에는) 진단할 수는 없다. 는 겁니까?
남편 : 그렇습니다.
그래. 앤에게는 adhd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나, 진단을 할 수는 없다. 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결론이 있다. 앤의 ‘adhd가 의심스러운 성향들’로 인하여 앤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귀엽고 어이없으면서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캐릭터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아. 그녀의 충동성, 부주의함, 과장됨, 오바스러움은 그토록 매력적이었다! 나도 ‘나의 adhd’ 성향들이 나의 사랑스러움일 거라고 믿고 싶다.
*남편 : 잠깐! 앤이 마음씨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그런 면들이 이해받고 편안하게 잘 자랐으니 다행인 겁니다. 그렇지 않고 앤이 계속 고아원이나 남의 집을 전전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더라도 과연 성숙하고 지성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휴. 천만 다행이다.
마리라와 매슈를 앤이 만나서!
아름다운 그린게이블즈에 앤이 살 수 있어서!
루시모드 몽고메리 여사에게 다시 감사를 깊이 전한다.
나의 앤을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adhd가 있으면 어때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
ps : 이제 앤이 더 심했는지 내가 더 심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의 어린시절의 히스토리를 살펴보아야겠다. 다행히 내게도 기록이 있다. '안녕 나의 한옥집'을 통해 내 어린시절을 파헤쳐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