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태우고 싶어서 태우는 건 아니랍니다.
한동안 ADHD글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바쁜 탓도 있었지만 새로운 약을 아직도 받지 못한(않은) 탓이기도 하다. 명색이 ADHD관련 글인데, 약을 새로 먹어가면서 그 효과를 느껴가면서 글을 써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두달이 다 되어가도록 다시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 변명만으로도 또다시 한 편 글을 다 써도 모자라건만 나의 이 변명과 수많은 핑계와 이유들에 지친 건 남편 하나만으로 충분할 것 같아서 이정도로 하겠다. 다만 의사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했던 주제를 꺼내보려고 한다.
나의 현실 이웃 + 블로그 이웃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는 사실. 바로 나의 요리솜씨에 대해서다.
블로그에서 베이킹 실력을 한번 뽐낸 이후 블로그마을 대표 ‘똥손’’망손’으로 유명해진 현재, 이제 뭐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다. 블로그에 올린 나의 솜씨는 주로 ‘까맣게 타버린’것들이 많다.
마음씨 좋은 이웃님들이
밤호수님은 베이킹 말고 한식은 잘 하실 것 같아요.
라고도 하셨지만, 사실 그렇다고 한식을 또 잘 하는 것도 아니다.
또다시 마음이 넉넉하기도 하신 이웃님들이
밤호수님은 프라이팬을 이용하는 것만 아니면 꽤 잘 하실 것 같아요.
라고도 하셨지만, 또한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물론 특별히 취약한 부분이 있긴 하다.
<안녕 나의 한옥집> 책에서 보면 밤호수님 어머니랑 할머니는 요리의 대가셨던데, 어떻게 밤호수님은 그걸 하나도 안 닮았을까요?
라고도 많이 하시는데, 그 또한 나도 궁금한 바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나의 여러가지 일상의 모습들을 스스로 관찰하면서 ‘이것도 ADHD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요리’인데 이건 지금까진 정말 생각도 못해본 영역이었다. 먹는 건 좋아하지만 요리솜씨는 영... 그리고 요리 중에서도 특징적인 패턴이 있어서 끊임없이 망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ADHD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아. 이것도 물론 검증된 건 아니다. 일단 내 머리속의 정리가 끝나면 남편에게 (물어보긴 싫지만 궁금하니까)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 일단 그 패턴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
특별히 내게 어려운 요리분야는 ‘베이킹’이다. 대충 굽고 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니지만, 까다로운 ‘정량 레시피’를 따라해야 하는 베이킹의 경우는 완전 꽝이다. 일단 베이킹을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프다. 레서피를 과학공부하듯이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몹시 힘들기 때문이다.
Oz. ounce. ml. Cup. tspoon. Tablespoon. 왜이렇게 단위는 많은건지.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베이킹을 꽤 여러번 했음에도.
코로나 때 심심한 딸아이가 조르고 졸라서 나도 베이킹 비슷한 걸 여러번 시도했다. 단위에서부터 막혀서 친한 언니에게 카톡을 수천번 보내며 괴롭혔다. 병원에서 일하는 언니에게 마치 무슨 큰일이 있는 것처럼 닥달을 해서 답을 얻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고 난 이후 결과물이란! 매 단계를 조심스럽게 철저하게 밟았다고 했지만 그 어느 단계에서라도 실수가 나오게 마련. 단 하나의 단계에서 삐끗하면 작품은 망가지고 마는 것이 바로 베이킹인 것이다. 베이킹 언니에게 내가 뭐라도 해보려고 ‘언니, 그거 만들기 쉬워? ‘하고 물으면 언니는 ‘쉬워도 하지마’ 라고 답을 보낸다. ‘그냥 사먹어’라고.
지난번 스콘을 만들었을 때는 도저히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레서피로 성공한 적도 있었고, 정말 조심조심 정성스럽게 모든 과정을 밟았는데 정작 완성작은 ‘겉딱속딱’의 스콘이 나오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 무엇이 문제였을까. 딸아이의 실망한 모습 앞에서 나는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친언니의 반응은 ‘모든 과정이 문제였으리라’ 였다. 모두가 나를 믿지 않는다. 아니, 나의 베이킹을 믿지 않는다. 사실, 나도 믿지 않는다. 나의 베이킹을.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조직적, 단계별, 정확함을 필요로 하는 베이킹은 내게 맞지 않는다. 라고. 거기다가 숫자가 가득하니 나랑 친할 수가 없다. 웬만하면 사서 먹자. 꽝꽝.
*
베이킹이 아니어도 나는 수많은 음식을 태.운.다. 아까 소세지도 태울 뻔 했다. 아니, 거의 태웠다. 지난 달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돈까스를 하트 모양으로 수정해서 블로그의 ‘월간 벗’ 표지를 장식했다. 그걸 본 이웃님들은 기겁을 하셨고, ‘남편은 무슨 죄’에서부터 ‘혹시 일부러 태우는 거냐’라는 자작극 의혹이 줄을 이었다. (이 의혹은 언제나 받아왔다) 웬만하면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라고도 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건, 에어프라이어에도 종종 태운다. 이쯤 되면 나도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요즘 나를 가만히 보니까, 패턴이 있었다.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일정시간을 무조건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의 경우. 그리고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경우. 전자의 경우에는 ‘익는 동안 시간이 걸리니까 아주 잠깜만 다른 일을 하고 와야지’ 하고 갔다가 잊어버리는 경우 99프로. 후자의 경우는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라고 딴생각 하다가 아주 짧은 10초 정도를 놓쳐서 그때 타버리는 경우. 이렇게 두 경우가 있었다. 아까도 소세지를 구워놓고 ‘이건 30초는 이상태로 두어야 하니 가서 노트에 하던 거 딱 두 줄만 적고 오자’ 하고 식탁으로 갔다가 1분을 넘기고 만 것이다.
그 순간 남편이 한 말이 떠올랐다.
ADHD의 경우에는 초 단위, 분 단위 단기기억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장기기억은 차라리 괜찮지.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요리는 끊임없는 ‘단기기억’의 연속이다. 수많은 단기기억이 동시에 한 부엌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걸 잘 해낼 수가 있겠는가! 몇 초, 몇 분만 놓쳐도 음식이 타버리고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걸!
또한 요리는 복합적 사고를 요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종합예술이다.
내가 아는 요리 인플루언서 분은 ‘요리로 예술을 하시는’ 분인데, ‘기분이 우울할 땐 요리가 최고’라고 정말 신기한 말씀을 하신다. 그 분의 포스팅을 보면 ‘재료 손질’부터가 이미 요리의 시작이라 매우 차분하고 일목요연하다. 그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기까지 하니 정말 놀랠 노 자이다. 그 다음에 불에 굽고, 찌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하는 갖가지 과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지만 하나하나를 질서정연하게 단계별로 해나간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완성작을 접시에 담는 플레이팅이다. 마지막 화룡점정이다. 단 하나의 과정에서도 ‘대충’이 없다.
예전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의 어르신들을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정말 한꺼번에 대여섯 가지 그 이상의 요리들을 척척 해내셨다. 이걸 다듬으면서 저걸 씻고, 여기에 불을 조절하면서 저기에서 양념을 무친다. 복합 사고의 결정체다. 나의 머릿속 채널은 언제나 몇 개씩 열려있지만, 한꺼번에 요리에 있어서는 다양한 채널이 열리지 않는 듯 하다. 채널 하나를 요리에 주었다면 다른 하나는 아침에 흥얼거리던 노래에, 다른 하나는 마저 써야 할 글에, 또 하나는 아침에 굶고 간 큰 애 생각에, 마지막 하나는 티비에서 보던 영화 생각에 머물러 있다. 온전히 요리에 모든 채널을 집중시키는 게 나에겐 참 힘들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내게 베이킹이 힘들었고, 여러가지의 요리를 한꺼번에 하는 게 힘들었으며, 수시로 음식을 태워먹었는지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 나 자신을 이해할 것 같다. 하나의 작은 세계. 부엌이라는 완전한 공간. 그 안에서 매 끼니 때마다 수많은 조직적 복합적 단계의 사고와 행위가 이어진다. 그것은 무수한 단기기억들로 이루어진다. 조직화에 약하고 집중력에 약하고 단기기억을 끊임없이 놓치는 ADHD에겐 쉽지 않은 행위인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무리 실수가 만발이라고 하더라도 나 역시 주부로 보낸 세월이 늘어가면서 ‘자동반사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나아지는 부분이 꽤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태울 염려가 없는 국 같은 것에 대해서는 날마다 실력이 늘어나고 있고, 특히 불을 쓰지 않는 샐러드, 생채식, 토핑 이런 건 꽤 자신이 있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이니, 오늘보다 또 내일 나아지지 않겠는가. 열 개 태울 거 다섯 개만 태워도 그게 어디?
그리고 또 하나 지금 매우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과 함께 이 ‘요리와 adhd의 상관관계’에 대해 토론을 해보려고 하였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내 안에서 정리가 끝난 것이다. 아. 나도 adhd에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나 보다.
아무튼간에 이제 ‘요리하는 나 자신’을 알았으니, 요리를 할 때 조금 덜 태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요리를 시작할 때의 ‘나’를 제3자가 되어 관찰하면서 조금 더 정신차리게 해야겠다. 아. 그리고. 약도 먹어야지.
<남편과의 대화>
남편 : 당신이 스스로를 관찰하고 발견해 나가는 게 놀라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통찰력이 정말 중요하지.
나 : 아니. 그런거 말고. 내가 분석한 것들이 일리가 있냐고
남편 : 어. 충분히 일리가 있어. working memory. 이걸 '작업기억'이라고 해야 하나. 당신이 말한 단기기억은 short term memory 인데 그것도 맞지만, working memory가 더 적당한 표현이야. 우리가 어떤 인지적 사고나 행동을 할 때,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머리속에서 계속 생각을 유지하고 있거든. 그래서 일을 잘 끌고 가는 거지. 그게 working memory인데 adhd가 있는 사람은 그게 특징적으로 잘 안돼. 그러니까 붙잡고 있어야 할 일들이 자꾸 사라지는 거야.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그래서 자꾸만 부주의한 현상이 벌어지는 거지. 몇 분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머리속에 남아있지 않고, 사라지고.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 이게 병인 거지. 소세지를 굽고 있다는 기억이 보통 사람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지만 여보는 금세 사라지는 거야.
나 : 그건 거의 바본데…
남편 : 그건 아니고 의도하지 않게 자꾸 사라지는 거야. 당신이 전에 학교에서 서류에 사인을 해놓고 기억이 안나서 모두가 찾고 난리났었다고 했지? 그 working memory가 장기기억으로 전환이 안되고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까 까맣게 잊어버린 거지.
나 : 그런데 또 바로 생각이 나. 아. 참. 소세지 굽고 있었지? 라고.
남편 :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나보지. 그건 탄냄새가 나서 그런거 아냐?
나 : (그러고보니 그런 듯)
남편 : 당신의 이런 통찰력은 훌륭해. 그런데 다만, 이런 글을 쓸 시간을 조금 아껴서 빨리 의사를 만나고 약을 받도록 해. 그게 나의 바람이야.
추신) *이렇게 말하면서 지금 프라이팬에다가 닭가슴살을 올려놓고 왔다는 건 비밀이다. ‘이건 구워지려면 십분은 걸리니까 마저 쓰고 와야지’ 하면서. 얼릉 여기까지만 쓰고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