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의 변명
독자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 글의 7편에서 나는 long acting약을 시도해보려 하고 있고, 그 마지막에 ‘의사와의 약속은 곧 잡혀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의사와의 약속은 잡혀있지 않았다. 그 말을 쓸 때의 마음으로는, 바로 그 글을 다 쓰자마자 병원에 연락을 해서 의사와 약속을 잡을 계획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나는 과연 그 글을 쓴 이후 어떻게 했을까?
바로 의사에게 연락을 취해서 약속을 잡았다.
까먹었다.
맞다. 까먹었다.
나는 그 다음이라도 예약을 했을까 안했을까?
했다.
안했다.
맞다. 안했다.
그럼 왜 안했을까?
대체 왜! 독자에게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는가. 약속 잡았다고! 이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자 작가의 양심에 어긋나는 비윤리적인 행동이다. 글을 쓸 때는 그렇다 치더라고 최소한 글을 쓰자마자 예약을 잡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나는 계속 생각해 왔다. 그러니까, 이 글의 7편을 쓴 1월 31일 이후부터 쭉. 오늘이 2월 7일이니까 8일이 지났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결국 오늘까지도 나는 예약을 잡지 못했다.
이 글은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의 글이자 adhd를 지닌 어느 사람의 머릿속을 분석한 글이다. 그날 이후 나의 의식을 단계별로 살펴보겠다.
1.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병원이고 예약이고 약에 대한 것을 일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것은, 내가 갖고 있던 처방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그때 한달치 약만 처방받았기 때문에 금세 약이 떨어진 것이다. 아. 약이 없구나. 그때서야 퍼뜩 생각이 났다. 맞다. 내가 글에다가 ‘long acting약을 위한 예약을 잡아놓았다’고 했지? 빨리 약속을 잡아야겠다.
그래. 뭐 책도 아니고 브런치에, 그것도 구독자가 천명 넘고 막 그런 브런치도 아니고 이백명 정도인 브런치에, 좋아요를 막 몇백개씩 받는 브런치작가도 아니고 끽해야 2~30개 받는 작가의 글 7편의 마지막 문장 따위를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 좋아요 2~30개 매우 소중함을 짚고 넘어간다) 거기다가 내가 가서 슬쩍 한 문장 정도 바꾸어도 된다. ‘나는 곧 long acting 약을 처방받기 위한 의사와의 약속을 잡을 것이다’ 라고. 그러나 나는 작가적 양심으로 빨리 약속을 잡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2.
마음을 먹었으니 예약을 해야 한다. 그런데 연락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메일을 열어서 예약기록을 찾아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3.
메일을 살펴보기까지 또 며칠이 흘렀다. 생각은 했어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힘든지 앞에서 누누히 설명하지 않았는가?
4.
다시 며칠이 지나 바로 오늘. 나는 메일을 열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검색어를 넣고 메일에서 진료기록을 찾았다. 아무것도 없다.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하고 진료를 받았지? 아. 의사 이름이 뭐였더라. 병원 이름이 뭐지. 그러나 아무 기억도 없다. 내게 기억나는 건 오직 인도인 의사의 얼굴도 아닌 목소리 뿐.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나는 고민중이다. 의사의 이름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약국에 가서 내 약을 처방한 의사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 방법을 실행하기까지 또 몇 달의 시간이 흐를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나가서, 약국에 가고, 또 약사를 만나고, (그것도 영어로) 묻고 가져와서 다시 병원 예약을 해야 하는 몇단계의 일이 있으니까.
또 한가지의 방법은 어짜피 별로였던 그 의사를 지우고, 다시 다른 병원을 찾아서 예약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예약을 잡으니 같은 병원이고, 같은 의사이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둘중 하나의 방법으로 내일 시도해 보겠다. (부디)
그렇다고 나를 늘 이런 사람으로 생각하진 말기를. 지금 에세이클럽 숙제검사랑, 글써서 내야 할 일은 하루에도 백번씩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줌미팅 약속도 잊지않고 있다. 나름대로 치밀한 사람이다.
ps.
지금 남편이 와서 말해주었다.
다 먹은 나의 약통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의사 이름이랑 전화번호랑 적혀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