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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Jun 07. 2024

사유와 소통



한때 좋아했지만 이제는 보고 있으면 거북한 단어들이 몇 있다. 이거 마치 홍대병 같은 걸까.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무명의 뮤지션을 좋아하다가도, 그가 유명해지자 괜시리 마음이 식어버리는 것과 같은.


여하튼 그런 단어의 대표 둘을 꼽라면 '사유'와 '소통'이 있다.


1)사유(思惟) -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내가 사유라는 단어를 여럿에 걸쳐 본격적으로 접해본 것은 스무 살 때쯤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통해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일단 책 자체가 더럽게 재미가 없어서 완독을 못하고 중도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시학>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더라면 시를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까, 하는 건 해봤자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가정이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그러니까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거나 읽어야 볼 수 있었던 단어였는데 이제는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가, '사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여, 남발이 되면 결국 무어냐, 가치가 떨어진다 이거예요. 여기서도 사유, 저기서도 사유, 하도 사유사유 하니까, 내가 사유리도 아니고, 사유라는 단어의 사유가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님에도, 굳이 또 그렇게 사유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 사유가 궁금해져서, 아이고 됐어요 저는 안 사유, 하고 싶어 진달까.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듯해서, "난가?" 하는 사람들이 있을런지 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온라인에서 '사유'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좀 징그러운 타입들이 많았다.

먹물냄새가 가득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지 알 수 없는 글쟁이 하나는 심심하면 사유사유 해대고, 지방에서 책 파는 아저씨 하나는 "여러분 책을 읽고 사유하십시오오오오." 하는데 그 아저씨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노라면 사유라곤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아 보여서 좀 웃기기도 하고, 고액 책쓰기 협회의 대표라는 사람 또한 '사유'라는 단어를 즐겨 말하는데, 작가 지망생들에게 그렇게 고액을 받아먹고서 엉망으로 만들어진 책을 계속 출간하게 되는 그 사유를 물어보고 싶어 진달까.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사유'라는 단어가 온라인에서 보이면 흠칫 징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단어가 어느 순간 징그러워졌다니 생각하면 몹시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 쏘 쌔드!

개인적인 생각으로 최근 년간 '사유'라는 단어가 가장 그럴싸하게 쓰인 것은 반가사유상이 전시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 아닐까 싶다. 정말이지 사유가 사유답게 쓰인 곳.


2)소통(疏通) -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내가 '소통'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말이야. 그 옛날 싸이월드 있잖아. 거기 대문짝에 사진이랑 짧은 글귀를 적어둘 수 있었는데, 내 싸이월드 대문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 피아노 치는 벨기에 뮤지션 시오엔(Sioen)의 얼굴을 걸어두고 딱 2음절 적어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소통'이었어. 그만큼 내가 소통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이겁니다. 네? 예?


소통이라는 게 모야. 서로 오해 없이 통하는 거 아니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냐 이거지. 근데 역시나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논하는데 보고 있으면 뭔가 말을 더하면 더해질수록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오해만 쌓여간다 이거지.


또 누군가, 제가 여러분과 소통하겠습니다, 하면 서로 오해 없이 이야기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일방적으로 말을 할 테니까능, 너는 그냥 무조건 내 말이 옳다 생각하고 따르거라..."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이 생겨난 거 같아. 내 말이 곧 정의다, 내 말이 곧 진리다, 내가 인플루언서다, 내가 짱이다, 내가 월천 번다, 하면서 으스대면서 소통소통거리는 사람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누가 '소통소통'하면 뭔가 좀 징그럽다는 느낌이 확 올라오면서 오히려 경색을 떠올리게 되는 거여... 시부랄놈 저 생키 또 혼자 떠들어대겠네, 뭐 그런 생각이 먼저 들면서... 아이고 제가 무슨 말을...


암튼 한때 좋아했던 단어들이 징그러워진다는 것은 여러모로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도 앞으로 사유하면서 여러분들과 소통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 꾸에에에엑...


짤은 한때 싸이월드 대문짝에 걸어두었던 좋아하는 사진, Sio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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