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콩고 민주 공화국 이야기
해외에 취직하게 된 계기는 2가지 이유다.
우선은 국내보다 월급이 많고 해외 경험을 할 수 있다.
전공이 프랑스어라 취업 전부터 박람회에서 프랑스어 통역을 했었다.
아프리카에 취직을 하더라도 지중해와 가까운 북아프리카에 근무하고 싶었다.
하지만 졸업 후 생각보다 취업은 힘들었다. 솔직히 마지막 학기 때도 취업난의 심각성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1년이 지났는데 덜컥 집안이 힘들어졌다. 이대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파견지역을 가리지 않고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집에 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원래 살던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빚이 생긴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던 중
경제적으로 집안이 힘들어졌고 그리고 계속 구직활동만 하기에는
내가 너무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것 또한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하고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합격이었고 1달 뒤에 수도 킨샤사로 가게 되었다.
졸업 후 1년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일자리는 분명 있었지만 불필요하게 받은 대학 졸업증 때문에
좋은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직장이 아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직장.
어른들 세대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부족해서다.
일자리수가 부족하든 경제적으로 여건이 좋지 않든 그건 모두 내 잘못이다.
과정보다는 항상 결과가 중요시된다.
구직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이다.
나에 대해 묻는 질문은 모두 취업이었고 구직 중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전혀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부모님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나와 어릴 때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막말을 한다. 그 누구보다도 일자리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나 자신인데.
그 말 한마디가 남에게 상처 준다는 생각은 전혀 못한다.
어떻게든 일자리는 찾아야겠고, 이대로는 미래도 불투명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꼭 국내에서만 취업해야 하나?"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면 해외에서 취업을 하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구직 사이트에 해외 취업 희망으로 분류하고 이력서를 등록하였다.
한 헤드업체로부터 이메일을 받게 되었고 근무지는 아프리카였다.
출국 준비로 1 달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기분이 마치 군에 재입대하는 기분이었다.
1달이 지났고 출국 전날 친형 집에서 잤다. 전날 한숨도 못 자고 인천공항까지 택시를 탔다.
계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걸까? 적응은 잘 할까?
해외라서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데..
더욱 속상했던 일은 대한항공의 실수로 출국장까지 급하게 뛰어가야 했다.
상황은 이랬다. 아프리카까지 가기 위해서는 총 2번의 경유를 해야 한다.
태국 방콕을 거쳐 케냐의 나이로비까지 총 20시간이 걸린다.
내가 발권한 항공권은 케냐항공이다.
케냐항공은 총 40KG의 수하물을 허용해준다. 그런데 대한항공 수하물 규정을 적용했다.
비행기는 타야겠고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100만을 결제했다.
분명 착오가 있는 것이니 확인해보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소용이 없다.
시작부터 느낌이 안 좋은데..?
결국 형이랑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담배 한대도 못 폈다.
땀범벅이 된 채로 기내에 탑승을 했다.
비행기 탑승 후 내가 아프리카에 가는구나 실감을 했다.
기내 좌석의 반은 아프리카 사람들로 그 나머지 반은 중국인들로 가득했다.
태국 방콕에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과
도착하면 정착하게 될 콩고 민주공화국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비행기를 이렇게 오래 타본 건 아마 처음인 것 같다. 태국까지 5시 30분
태국 공항에서 경유 2시간 그리고 태국에서 케냐 나이로비까지 10시간가량을 타고
거기서 3시간 대기 후 또 3시간을 더 가야 콩고 민주공화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 23시간가량을 비행기를 탔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타고 싶지 않다.
킨샤사 공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왔을 때 공항에 미리 마중 나온 현지 직원 덕분에 회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 처음 들었던 말은 공항 세관 직원들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본 적으 100달러 정도는 기본적으로 요구하였다. 한국의 60~70년대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숙소에 도착해서 그날 저녁 처음으로 아프리카 술을 마셨었다. 달콤한 레몬향의 맥주였다.
사이다 같은 느낌도 많이 났고 아프리카 근무할 때 저녁마다 한 병씩 마시고 잤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도 Savanna 마시면 아프리카 때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아프리카 근무 때 너무 외로워서인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Portsman이라는 현지 담배가 있었는데
말보로 레드보다 더 독했다. 6개월 정도 현지 담배를 피우다 한국 담배를 피우니까 한국 담배에서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만큼 독한 담배다.
일하다가 스트레스받으면 담배 피우고 혼자 쉬는 날 창밖을 보면서도 폈었다.
일적으로도 적응을 잘 못했고 아무래도 회계라는 업무는 나와 맞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어만 잘하면
쉽게 일을 배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다.
업무보다도 가장 나를 힘들게 했었던 건 아무래도 밖에 나가도 할 게 없었다.
식당 외에는 대형 쇼핑몰 하나 없다.
그러다 보니 집에 박혀 영화를 보는 게 대부분이었고 스트레스를 밖으로 분출할 방법도 없었다.
회사 내에서는 사람에 치이고 일은 일되로 치이다 보니 그만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기도 엄청 외롭다. 의지할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 2~3년씩 보낸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게 외로웠었나 보다.
회사라는 시스템에서 나라는 존재는 부품이었다. 회사는 이익 창출이 최대의 목적이기 때문에
유능하지 않는 직원은 회사를 위해서라도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회사 내에서도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작은 실수 하나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지에서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현지 소장님의 호출로 사무실에 갔었다. 호출하시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현지 소장님과 상담 중 잘 맞지 않은 걸 알았다면 왜 미리 퇴사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셨다. 그래도 버텼던 이유는 파견 전에 상무님께 인턴 기간만큼은 열심히 해보겠다고 꼭 말씀드렸다. 그래서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현지 소장님은 10년이 넘도록 아프리카 생활을 하셨다. 나는 그렇게 장기간 해외 근무를 할 자신이 없기에 지금도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소장으로 근무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혹시나 글 읽으시면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다. 아프리카 근무 경험은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해외 근무지로 파견되었을 때도 별로 힘들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취업하기까지 정확하게 1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아랍 에미레이트로 파견되었고 현재도 근무 중이다.
여권심사 후 통과하려고 하자 로컬 직원이 물어보았다. 비자까지 받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빨리 그만두었냐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일을 잘 못했고 이 나라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전 직장을 그만둘 당시에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다음 직장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태국이 중간 경유지라서 태국에서 1주일 동안 머물기로 했다.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서 태국 방콕까지는 탑승객이 많지 않아서 누워서 갔었다. 자면서 마음이 너무 홀가분해서 푹 잘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콩코 킨샤사에 있을 때는 마음 편히 잔 기억이 없어서 잠을 자도 항상 피곤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태국은 항상 나에게 쉼터 같은 곳이다. 기회가 된다면 태국에서도 근무를 해보고 싶다.
다음 이야기는 현재 아랍에미레이트에서 근무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느낀 점과 일상 생화를 좀 더 자유롭게 다루고 싶다. 더불어 해외 취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