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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Feb 02. 2023

(8) 진짜 위험은 따로 있다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30여 년 전에 <위험사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사회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위험 평가와 관리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사회는 재난적 위험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위험들은 대부분 천재지변보다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위험이 대부분 입니다. 기후 위기, 환경파괴, 인간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한 숲과 정글의 축소와 이로 인한 야생동물 바이러스가 인 간에게 전이되는 현상, 미연준의 금리인상, 스테그플레이션, 소소한 개인들의 노력과 별개로, 외부 요인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위험에 우리는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염병 유행시 선진국들부터 백신수급이 이루어지고, 노인요양병원에서 사망률이 높은 현상처럼 이러한 통제 불능의 위험들은 사회적 약자들부터 위협합니다. 코로나 기간 공공 교육시설부터 먼저 폐쇄가 이루어졌습니다. 공공 놀이터들도 빗장이 쳐졌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의 아웃 도어 산업과 골프장 사업은 역으로 가파르게 성장했습니다. '밖은 위험하고 더러우니 실내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라는 발상에 이미 차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동의 자유와 공간의 자유가 종속되어 있는 어린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집안에서 부모와 스마트폰 사용문제로 서로를 할퀴고 있었습니다.  




진짜 위험은 신호등과 빗장이 가득한 온실에서 12년의 유년 청소년시절을 보내다가 갑자기 청년으로 사회에 내던져진 상태가 아닐까요? 12년 교육기간 내내 안돼! 하지 마! 더러워! 이런 이야기만 듣다가 청년이 되면 국가로부터 아이러니한 요구를 듣게 됩니다. "청년이여 도전하라!" 무슨 무슨 창업지원 아카데미와 청년 일자리 지원 정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선진 기업들은 학벌 좋은 청년들을 선발해도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논하기 전에 지금의 청년들의 12년 전부터 어떤 시간을 쌓아 왔는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놀이를 통해 자기와 세계를 마주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아이가 이 자유로운 실험의 과정 중 찰과상을 입고 골절상을 입을 위험 가능성과 그 어린이가 앞으로 현실에서 마주할 위험 중 어떤 위험이 더 큰 위험일까요? 한 번도 자가움을 맘 껏 실험해보지 못한 채 마음껏 놀이하는 기쁨과 자기 긍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사회에 덜렁 내던져지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놀이가 미래 인재를 기르는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경과학적인 근거가 밝혀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놀이의 결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목적이 라고 볼 순 없습니다. 니체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인생의 단계를 낙타-사자-어린이의 단계로 인간 정신의 성장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낙타는 현재 많은 기성세대 어른들이 말하는 세계입니다. You should의 단계입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단계입니다. 어쩌면 우리 유년-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의 교육은 이 Should를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보다 훌륭한 낙타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학습기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니체는 이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책임과 짐을 짊어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단지 놀이를 훌륭한 낙타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간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기존의 체제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려고 분투하고 싸우는 '사자'의 단계를 거쳐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인간 모든 생사 고락을 다 다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며 자유의 단계로 이른 어린아이의 단계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정신이라고 니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즐기는 초연한 인간이 저희가 어린이와 놀이의 세계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낙타는 You should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I will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는 그저 I am이라고 말합니다. 



푸코의 개념을 빌려오면 현실에 구현된 반-공간으로서 일시적인 유토피아를 헤테로피아(Heterotopi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현실에 없는 이상 공간입니다. 현실 속에서 일시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측면에서 빈둥은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을 빗겨나가 있고 일종의 탈출과 해방의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빈둥은 일종의 헤테로피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삐삐 같은 어린이가 마음껏 누리는 빌러비 마을 같은 공간은 현대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빈둥은 일상을 빗겨나가 탈주하고 관점을 전유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일상을 살만한 곳으로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일상에 구현된 헤테로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합된 마을 환경 아래서 놀이터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환경으로 가기까지 현실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빈둥은 일시적으로 나마 관점을 바꾸고 잠시 해방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인 '빈둥 플레이'를 만들어서 지역과 공유하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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