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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Aug 08. 2023

놀이와 예술의 공통점

첫 번째 편견, 놀이는 미래의 쓸모를 위한 연습이다.


인간의 고유한 특징을 설명할 때 인류학에서 호모파베르, 호모사피엔스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동물도 도구를 사용하고 심지어 집도 짓는다.  그리고 유희적 행동과 놀이 또한 인간만의 고유한 행동은 아니다. 유심히 관찰하면 새들의 둥지 꾸미기,  동물들의 춤과 노래,  어린 사자들의 가짜로 이빨로 물면서 뒤엉켜 노는 행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어린 야생동물의 놀이를 묘사하면서 놀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환경에 적응하고 미래의 사냥하는 법을 익힌다는 내레이터의 멘트를 종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해설자의 관점에서 동물의 놀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생물학적 목적론적 설명이 어느 정도 유효할 수 있으나 놀이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놀이에는 목적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조차도 놀이는 물질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요한 하위징가의 유명한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도 놀이를 단지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 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들은 처음부터 놀이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p.35) 그의 관점에 의하면 진정하고 순수한 놀이는 문명의 주된 기반들 중 하나임을 그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두 번째 놀이에 대한 편견은 놀이는 진지함과 거리가 멀다는 관점이다. 


놀이는 유치한 것이며 말 그대로 어른들의 진지한 일과 거리가 있고 유소년기에 잠시 지나가는 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놀이는 매우 진지하다. 정치 풍자를 하는 코미디언을 생각해 보자. 프랑스 나폴레옹을 황제 즉위를 풍자했던 삽화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풍자 만화가들도 표현의 자유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창작을 했다. SNL 같은 코미디는 어떤가? 코미디언들의 장난으로 보이는가? 실재 살아있는 권력들을 면전에 두고 식은땀 나는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유력 대통령 후보들을 돌아가면서 게스트로 모시고 정치 풍자를 면전에서 허락하게 하는 영리한 전략을 쓰기도 한다.  그 외 게임, 체스경기, 축구경기 등을 생각해 보자. 선수들은 전혀 웃지 않는다.  삶을 걸고 게임에 임한다.  어린이의 놀이는 어떠한가?  어린이의 놀이는 때때로 심각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아지트를 만들고 꾸미고 이를 무단으로 침략한 이가 있다면 즉시 적으로 간주한다. 인형 액세서리 하나의 소유권을 두고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서 어른들은 그까짓 것 가지고 유난을 떠냐고 핀잔을 준다. 그렇다면 인간 문명을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 거리 두고 지켜본다면 땅 한 뼘 침범한 것을 두고 소송 송사하고 심지어 욕설에 칼부림이 나는 어른들의 문명사회는 이와 크게 다를까?  인간사회 밖의 초월적 존재가 어른들의 문화를 지켜보면서 뭐 그까짓 것 가지고 유난 떤다고 핀잔을 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놀이의 일반적 특징


하위징아가 말하는 놀이의 첫 번째 특징은 자발성이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단지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과 정비례할 뿐이다.( p42) 굳이 놀이의 목적을 규정한다면 이것이 놀이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는 의무적으로 수행할 일이 아니라 언제든 원하면 그만두거나 연기될 수 있다. 육체적 필요를 위해 도덕적 의무 때문에 수행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다.  자유시간에 한가롭게 할 수 있는 행위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놀이수업"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자기모순적 단어이다. 물론 수업에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서 단체 게임이나 놀이는 어린이 청소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놀이는 이러한 프로그램 이후에 어린이 청소년들이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규칙을 모르는 친구에게 규칙이 전수되고 반복되고 전수되는 가운데 조금씩 규칙이 변형 변주되고  그들 스스로 규칙을 재 창조하는 단계까지 가는 자유와 여백의 시간이 허락되어야 진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형태적 특징은 일상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관점이다. (p42) 대표적인 형태가 역할 놀이인데 어린이들은 놀이 가운데 ~인체 하기의 대가가 된다. 어른들은 이러한 어린이의 ~인체 하기를 보면서 놀이를 통해 사회와 어른들의 모습을 모방하고 예행연습을 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어린이가 장래희망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위해 예행연습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른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미숙한 이들의 모든 행위를 미래를 위한 투자와 연습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식이다. 하지만 어린이의 ~인체 하기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뛰어넘으면서 어린이 스스로를 숭고하거나 아름답거나 위대한 지위로 올려놓는다.  지극히 현재적이며 자기 충종적이다. 미래를 위한 예행연습으로 무언가 행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직업 가상 체험 현장 프로그램은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어린이의 특징을 보고 어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가상 직업체험 현장에서도 미래를 위한 체험을 하기보다 다양한 옷을 입어 보거나 무언가를 조작하고 만지는 등 현재적 감각 욕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놀이와 예술의 공통점 

다시 말해 놀이는 무용하고 무목적이다. 유명 드라마의 대사처럼 '무용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어린이의 순수한 놀이와 예술은 닿아 있다. 놀이와 예술의 공통점은 즉물적인 효용과 성과 혹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건실한 봉사와 거리가 멀다.  놀이와 예술은 때때로 불손해 보이고 무용해 보이며 무목적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때때로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억압되고 핍박해야 할 대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시대를 초월해서 파시즘 혹은 독재 권력은 예외 없이 예술을 통제하고 억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정 시대 사회이념에 따라  특정 사회 미덕 만을 예찬하는 문학과 예술, 나치의 퇴폐미술전,  전제 군주의 분서갱유, 극우 무슬림정권의 대중음반 화형식, 공산정권의 선전선동 예술,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향 등 모두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을 자원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도 어린이의 무용한 놀이 또한 억압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무용함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공통점은 즉물적인 효용과 예술의 사회적 봉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풍성한 사회는 하나같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다양한 괴짜들을 허용하는 관대함이 있었다. 괴짜와 이상한 사람, 정신병, 장애, 소수의견, 작은 목소리 등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이를 전달할 통로가 열려 있으며  설사 나와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오픈된 테이블 위에서 이를 함께 논할 수 있는 분위기. 살롱과 카페 토론 문화가 발달한 사회는 어김없이 시대적 헤게모니를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놀이의 무용함과 무목적성은 예술의 무용함과 무목적성과 일맥 상통한다. 여기서 무용함과 무효용성은 예술이 진짜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의 진로를 예술 쪽으로 정할 때 오는 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불안함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예술이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부모 본인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가 예술을 저평가한다는 사실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밥벌이가 용이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자녀가 예술 쪽으로 진로를 정한다고 말할 때 대부분의 상식적인 어른들은 근심을 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놀이' 또한 마찬가지 시선을 받게 된다. 아름다움과 건강한 웃음을 사랑하는 상식적인 어른들은 어린 시절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놀이를 대부분 지지한다. 하지만 놀이가 청소년기 청년기까지 지속된다 할 때 어른들은 근심하게 된다. 이제는 좀 더 현실적인 쓸모를 위해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위해 참고 고통을 견디는 것이 진짜 현실이고 놀이의 만족은 가짜 현실이지 않을까?  고시시험이나 대학입시, 취업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보편적 두려움이 어린이 청소년이 '놀고' 있을 때 이를 불손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놀이와 예술의 유용함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발생한다.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수준을 발현하는 놀이와 예술은 종족 보존과 양육 번식,  당장의 생활필수품 등 즉물적인 보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일상을  뛰어넘어 공동체와 사회의 안녕과 복지에 전혀 다른 차원으로 기여하게 된다.  예술은 신비와 의례,  신성함, 숭고함, 아름다움, 비극과 인간에 대한 성찰 등 삶에 대한 비평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삶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고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좀 더 지속가능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장기적으로 신성한 행위로써 놀이와 예술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다른 차원에서 필수적으로 봉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놀이와 예술을 즉물적인 쓸모와 효용을 자꾸 연결 지으려는 주류 어른들의 언어를  우리는 거절한다. 




빈둥에서 놀이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가장 진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빈둥에서 놀이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가장 진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세상의 일들을 가만히 살펴볼 때 그중에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면 현재 로켓공학, 전파레이더기술, 핵물리학 기술이 가장 발전한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이다. 지금 러시아는 그 기술을 가지고 어떤 종류의 진지한 일을 하고 있을까?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진지한 일과 어린이, 예술가, 광대가 하는 놀이라는 쓸모없는 일중 어떤 일이 더 인간성의 척도에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일이 더 쓸모 있는 일일까?  


물리학자 아르망 투르소는 "가장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다.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다. "라고 말했다. 예술 교육 현장에서 이 말을 인용해서 "최악의 교사는 예술가가 아닌 교사이다. 최악의 예술가는 교사가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말한다. 즉, 과학 예술 교육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뽑으면 바로 '노는 마음'이다.



공간과 자리를 마련하는 어른들의 마음

놀이 공간을 기획할 수 있는 주체는 대부분 어른들이다. 도시 공간에서 특정 부분을 어린이 놀이 환경으로 만들도록 허락하는 것도,  예산을 집행하고 실행하는 것도 그리고 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도 어른이다.  그러나  무용함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언어 속에서 마술적 불확실함과 우연성, 열린 가능성만큼 위험한 단어는 없다.  


효용성이 지나치게 우대되는 사회 속에서 불확실함과 가능성만으로 예산과 공간을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관리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며 불확실함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인 사회에서 어린이의 마술적 환상과 우연적 놀이의 가능성은 공존하기 힘들다.  그리고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재난적 사건 가운데 위험과 정치적 책임 추궁이라는 이슈가 점점 더  민감하게 부각되고 있다.  분노한 대중은 재난적 사고에  명확한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고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리고 말단 관료들부터 관리자들은 경영 관리의 핵심 메커니즘이  "공익적  일이 진짜로 되게 하거나" "공공복지 서비스"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있기보다는 모든 정치적 위기 속에서 책임공방을 피할 근거를 마련하는데 대부분의 업무 역량이 집중되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윗사람이  말단 직원의 안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위기관리에서 한번 미끄러지면 정치적 위기로 직결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역량을 발휘해서 공익적 가치를 만들어가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역량을 위기 관리과 책임회피에 쏟는다. 여기서 위기관리는 문제 될 만한 일은 애초에 벌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성의 공간은 점점 공공사업 현장과 교육 현장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대중은 교육기관이나 공공기관의 전문가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공공의 기관장과 직원들은 정치적 안녕을 위해 서로 핑퐁게임으로 책임관계를  떠넘기기 바쁜 사이에 실제로 발생해야 할 어린이를 건강하게 돌보고 기르고 양육한다는 본질적 가치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비극적 책임공방의 분위기와  신뢰자본이 부족한 사회에서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과 자유로운 놀이를 위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것은 기적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무용한 존재로  도착했다. 철저하게 무용하고 기능적으로 무가치했다. 그리고 이유가 없는 공급을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한대로 빨아들이고 흡수하면서 성장했다. 부모는 그렇게 골수가 빠져나가고  늙어 가셨다. 그리고 나는 성인이 되었다. 무용함과 열린 가능성. 이것이 생명의 첫 번째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의 순환 과정가운데 언어로 다 담지 못할 아름다움과 이야기와 삶이 있다.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본다면 이런 무용함과 가능성의 언어들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쓸모 있음과 자격 없음, 무한경쟁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증명,  위기관리 책임 회피라는  언어가 점점 커져가는 동시대 환경 속에서 어쩌면  젊은이가 단순이 집과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주에서  어린이라는 가능태가  이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음을 보고 안 오는 것이 아닐까? 


이미 존재의 빚을 지고 이 세상에 먼저 온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생존을 위한 책임 공방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성장했듯이  무용한 것들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미숙함을 허용하고 환대하고 실험과 실수를 인정하는 가능성의 공간을 보다 많이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풍요와 빈곤의 시대  끼어있는 중간 세대로서,  분명 지금의 사회적 주류적 위치에 자리 잡은 건강한 어른들은  60-70년대  모두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 그러한 가능성과 믿음의 공간에서 자기를 잃을 정도로 놀이에 몰두하고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현재의 안정에 이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분들의 자녀와 손주 세대가 겪고 있는 빈곤은 종류와 양상이 다른 것이다.  바로 열린 가능성의 빈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린이들의 놀이의 공간은 일상생활 세계 속에 자리 잡은 신성한 의례의 공간처럼  환상이 가능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 제칠 수 있고 임시적이고  일시적 공간,  열린 가능성의 공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마술적 불확실함과 우연성을 수용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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