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양육환경과 놀이실험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 보고서
아내와 내가 넷째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아내와 내가 넷째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2016년 말 우리 가족은 셋째가 두 돌이 되어가던 해, 더 이상 59m2 서울의 신혼부부 임대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어떤 기준에서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뉴타운 지하철 역세권에 거대한 종합 쇼핑몰이 걸어서 닿는 곳에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원래는 20년 장기임대 주택이었지만 언젠가 일반 분양으로 저렴하게 불하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심리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초기 가격의 몇 배 이상 값어치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7년 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실 59m2 평이지만 그렇게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신식으로 디자인된 평면에 지하 주차장과 각종 편의시설, 음식물쓰레기까지 소각해서 폐기하는 중앙 처리 시스템, 쾌적한 인근 녹지와 보행공간 가까운 학교와 유치원 많은 조건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아이 키우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아이 3명인 체로 그곳에 10년 이상 머물렀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웃의 아내 친구 엄마들은 우리의 이사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이 동네에 계속 버티고 살아야지, 지금 이 가격에 이만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서울에 어디 남아 있느냐는 견해였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2014년 말, 잠시 북유럽 뽕을 잘못 맞은 게 원인이었다.
예술가로서 2개월간 핀란드의 한 미술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대단한 경쟁을 뚫고 초청된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핀란드 북부의 지방도시에 있는 생활예술박물관에 부속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단지 가족과 함께 지낼 집을 2개월간 공짜로 제공한다는 조건 그것 하나만 보고 지원한 것이었다. 나는 휴가가 필요했다.
사실 휴가도 아니었다. 2-3개월 휴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관두는 생활인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예술 강사였던 나는 애초에 희생하고 버릴 것의 무게가 매우 가벼웠다. 애초에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니 모두 관두고 떠나도 3개월 후에 뭐 먹고살지? 막막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막막한 상황은 매번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벌이와 저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아이 셋에 1000cc 경차를 타고 있었다. 다만 자동차를 사려고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었는데 차를 안 사고 그 돈을 여행 경비로 쓰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북유럽에서 짧지 않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아내와 나는 뽕에 취해 계속 서울 변두리 외곽지역을 둘러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쁘게 2015년 16년을 전시 프로젝트 일과와 초등학교 예술강사 일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아내와 가까운 시골에 집을 보러 다녔다. 남쪽으론 용인과 양지, 동탄, 북쪽으론 파주 월롱 그리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문산까지 그 외 양주시를 비롯한 서울주변 그린벨트 지역까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전원주택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도 일부 사실이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서울의 화려한 뉴타운에서 나답게 살 자신이 없었다. 나 답다는게 뭘까? 우리 답다는게 뭘까? 이미 주류에서 어느 정도 비껴간 30대 중반이었다. 앞으로도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애쓸 생각도 그리고 왜 그렇게 사냐는 쓸데없는 남들의 참견과 시선에 대응할 에너지도 없었다. 아이가 커갈수록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 예상되었다.
우리 스스로를 이 사회의 주류 정신으로부터 고립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스스로를 이 사회의 주류 정신으로부터 고립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들 인생을 담보로 위험한 짓을 벌린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양평이라는 시골로 이사를 결정했다. 집 바로 앞에 논밭이 있었고 경의 중앙선 전철역에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나름 서울로 계속 어린이 예술강사 일을 다녔기 때문에 나름 절충을 한 결정이었다.
2017년 2월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가지게 되었다. 대략의 서울의 저렴한 지역 아파트 전세 가격으로 55km라는 출퇴근 거리와 논밭 풍경과 협소한 마당이 딸린 14평*2층으로 구성된 단지형 단독주택과 맞교환했다. 당시 부동산과 자본시장 원리에 명민했던 한 친구의 말대로 감가상각은 감내해야만 했다. 가격이 오를 수가 없는 집이었다. 그나마 땅 값은 조금 보전되겠지만 땅값은 서울의 100분의 1인 데다 평수도 매우 작았다.
재산은 잃게 되겠지만 삶과 낭만을 얻었다. 애 셋 딸린 가장이 이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다.
재산은 잃게 되겠지만 삶과 낭만을 얻었다. 애 셋 딸린 가장이 이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다.
정치적인 배경을 더듬어 보면, 당시 박근혜 정권이 촛불시위로 교체되던 해였고 정권 말기 경기부양을 위해 신도시를 계속 건설했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구매하려고 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일본처럼 아파트 거품이 꺼지면 잃어버린 10년이 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시점이었다. 시민들은 청개구리처럼 정반대로 움직였다. 정부가 집을 사라 하면 안 샀고 사지 말라하면 샀다. 그다음 정권 때는 정확히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