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과 퇴근을 할 때에도, 장을 보러 나갈 때도, 교회를 갈 때도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생활에 있어 중심거리였다. 이 위치는 특히 전 편에서 본 백패커와 가까운 위치로 조금 아주 많이 높은 곳에 속하기 때문에 출발할 때는 편하게 내려가지만 다시 돌아올 땐 곧 등산!^^;..
200일이라면 400번은 더 지나다녔을 이곳과 다른 길거리들에 내 감정과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심지어 이 옆을 가면 AUT라는 오클랜드 대학교 주변에 있는 서브웨이의 냄새들이 아직도 느껴질 정도로 생각해보니 선명하다. 기록을 통해 내가 아직 까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되니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 편을 위해 내가 브런치를 도전하게 된 것 아닐까 싶은 강한 기억이 있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편은 다녀온 후 주저 없이 나오는 일순위 이야깃거리로만 이용되다가 드디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만큼 흥미롭고 즐겁길 바라며!
떠나기 전에 다짐했던 마음 그대로 기대를 품고 떠났었지만,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가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행복한 순간, 즐거웠던 순간도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절반 이상은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간나날들이었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혼자 남겨진 외로움이었다.이런 심정은 마치 도깨비 대사를 인용하면 딱 좋은 것 같다. 날이 좋아서 울었고, 날이 좋지 않아서 울었다. 또 비가 와서 울고, 핸드폰이 고장 나서 울고, 심지어 나 빼고 즐거워 보이는 밤거리 탓에 멀쩡한 밤에도선글라스를 끼고 울었다.
보통 워킹홀리데이를 하게 되면 어학연수처럼 몇 주 과정을 걸쳐 영어를 익히고 일을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나는 없던 자신감 끌어모아 일부터 시작했다.
(실은 어학원 비용까지 충당하기엔 벅찼기도 했지..)
6개월 동안 일했던 곳은 총 4곳이었고, 푸드코트 캐셔, 초밥집 캐셔와 서빙, 기억 안 나는 한식집이 있었고,
또 마지막 한 곳은 2달러 샵으로 불리는 잡화점에서 혼자 매장관리와 캐셔를 맡아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보통 워킹홀리데이로 파트타임 잡을 농장에서 체리피킹 등을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나도 그렇게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동행인도 없을뿐더러 혼자 농장에서 일하자니 조금 겁이 났었다. 그래서 나는 농장일을 포기하고 시티 잡을 구해서 돈벌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클랜드로 입국한 지 약 2주 만에 파트타임을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 당 4시간만 일했지만 뉴질랜드 시급은 2014년 기준으로 14.xx 달러로 생각보다 높은 급여로 flat fee(오클랜드는 주로 2주 단위로 방세를 지불) 충당할 수 있었지만, 생활비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한 타임 더 구해서 점심/저녁 타임으로 투잡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길은 grafton st. 에 있는 저녁 파트타임 출근길 중 하나.
오래된 아이팟으로 촬영했지만 역시 애플은 감성을 담을 수 있지 하며 남은 사진이다. 이 길로 출근했던 시간은 대략 오후 5시쯤이라 노을이 슬금슬금 찾아오는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 스트릿 주변으로 걷다 보면 큰 공원이 나오고,
즐비된 부촌의 풍경이 이어진다.
출근하는 길에는 돈을 벌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출근 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퇴근길은 유독 서럽고 외로움의 연속을 보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족 또는 지인들에게 영상통화를 자주 걸곤 했다. 오늘은 뭘 했는지 주저리 떠들다가 마지막은 보고 싶다는 말로 끝나며 하루를 보냈다.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흑역사이긴 하지만 지금 떠나는 워홀러 중 어느 분들은 나와 비슷한 상황이 될 수 도 있다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다!
일이 고될지라도 어쨌든 시간은 흘러가고, 남는 건 분명히 있다. 돈이 아닐지라도 인간관계로든 사진으로든 또는 이렇게 경험의 기록으로! 회상하면 슬픈 기억들이 먼저 튀어나오지만 후회로 남진 않았다. 고스란히 경험이나 사진으로도 분명 잘 지냈던 기억들도 떠올라서 전부 다 슬프고 힘들진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루에 파트타임 두 개를 하면서도 쉬는 날이나 주말에 자주 산책을 가거나 먹으러 다니면서 소소한 행복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은 늘 채워도 부족했지만, 부족한 데로 살만했던 경험이었나 보다.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나서 미화된 건지도!
파트타임을 지나다니면서 깨알 같은 에피소드들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중 하나는 2달러 샵을 가려면 기차를 30분을 타고 갔어야 하는 거리라 매일 출퇴근을 비싼 기차를 타고 다녔을 때 있었던 일이다. 기차 타는데 번번이 지연되거나 기차가 멈추는 일이 발생을 해서, 아무렇지 않게 멈춰있는 기차 안에서 멍 때리는데 옆에 앉은 키위 할머니 (뉴질랜드 사람을 흔히 키위 사람이라 부른다.)가
이번엔 왜 안 가는 거지? 라며 이야기가 잔뜩 터졌던 일이다.
키위 할머니랑 얘기한 이야기는 뉴질랜드는 살만한 것 같냐는 말부터 생뚱맞게 l과 r에 대한 발음 차이를 설명해주시고는 내 l발음이 조금 어색했는지 친절하게 교정도 해주셨다. 그분은 심지어 교육 쪽 직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기차 안에서 발음 교정을 받다니 요즘 말로 킹 받게 생뚱맞았다.
또 한 가지는 7월에 뉴질랜드는 겨울을 한참 보내고 있지만, 눈이 안 오는 도심지역이라 비가 매일 같이 쏟아지는 날씨였다. 비는 오는데 하늘은 맑은 상태일 때도 많았고, 나는 이런 날씨를 미친 날씨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비가 내리는 출근길에 후드 집업을 뒤집어쓰고 걸어가는 길에 누가 나에게 Good Morning 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다른 곳을 보고 가느라 누군가 하고 마주 봤는데, 보는 순간..(입틀막) 잘~ 생긴 직장인이 기분이 좋았던 건지 인사를 건네곤 나도 수줍게 good.. morning!이라 인사를 했지. 그리고 그 하루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다른 날도 마주치길 바랬지만 아쉽게도 그 후로는 보이지가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6개월간 여러 파트타임 잡을 경험 해보면서 많이 웃기도 울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통해 나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나에 대한 생각도 많이 전환되었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타입이기도 해서 뉴질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해결점을 찾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파트타임의 번외 편으로는 한 2개월 정도 한글학교에서 봉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주말마다 가서 봉사한 것인데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혼혈이거나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잘 모르는 키위 아이들이었다. 처음 봉사하기 전에는 친절하게 한글을 가르치는 나를 상상했건만.. 정말 아이들은 한참 클 나이라 에너지도 할 말도 넘쳤다. 그 덕분에 나는 내 목소리가 작지도 않은 편인데, 목에 힘을 주고 열변을 토해 한글을 알려줬고 끝나고 나면 기진맥진. 이렇게 2개월 간 마치고 한글학교의 한 학기가 끝나가면서 아이들과도 친해져서 재밌었는데, 수료식 날이 하필 내가 한국 가기 전 여행을 한다고 떠난 직후라 참석하지 못해 매우 아쉬웠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 편을 통해 내가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정보보다는 뉴질랜드에서 일을 하면서 외롭고 힘든 건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나는 소소한 일상들을 통해 나름 숨 쉴 구멍은 만들어지는구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주변에 워홀을 준비하거나 이미 가 있는 지인이 있다면 잘 지내냐는 안부를 한 번씩 꺼내며 연락해준다면 분명 그 지인은 엄청 반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