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청춘시대>
2016년은 내게 있어 특별한 해였다. 난생처음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며 생활을 했었던 해였기 때문에 많이 힘들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때 들었던 노래와 먹었던 음식, 봤던 드라마 등은 아직도 내게 강렬히 남아있다. 그 힘든 생활 속에서 힘이 되었던 것은 드라마 <혼술남녀>였다. 공시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 드라마를 보며 난 하루를 정리했고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런데 그 해에 내가 놓친 드라마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춘시대였다. 물론 청춘시대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손길이 잘 가지 않았었던 드라마였다. 그러다 ‘이번엔 꼭 봐야지' 작심하며 1화를 틀었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데에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여자 5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사실상 유은재, 강이나 그리고 윤진명이 주인공이었다. 송지원의 서랍장 귀신에 진지하게 반응한 이 세 명의 이야기가 인물들의 깊이를 더해주었고 드라마 전반을 이끌어가는 서스펜스에 동력을 불어넣었다.
유은재의 등장은 나로 하여금 예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했다. 나 역시 유은재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하숙집에 들어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학교에 다녔다. 내 대학생활 초반이 어땠는지는 청춘시대 1화에 다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확실히 1화를 이끈 것은 유은재였다.
나만 참는 줄 알았다. 나만 불편한 줄 알았다. 나만 눈치 보는 줄 알았다.
나와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만큼 불안하고 나만큼 머뭇대고 나만큼은 착한 사람.
유은재의 소심함과 불편함이 폭발했을 때 공감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 모두 다들 참아가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의 그런 면 때문에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우리의 고민은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의 고민이라는 건 곧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
유은재의 비밀은 시리즈의 후반부로 들어서며 더 추진력을 얻는다. 생각해보자.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이려 했고 실제로 죽였다. 그리고 나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 이런 과거가 있는 은재에게 사람과 삶이란 정말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마지막 보험조사관의 결과가 나올 때 우리가 같이 노심초사했던 것은 은재가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송지원의 말처럼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그냥 단지 물병을 바꾼 것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은재는 가장 혼돈스러운 시기에 가장 든든한 존재들을 얻게 되었다.
강이나는 윤진명과 떨어뜨려서 이야기하기 힘든 인물들이다. 아닌 척하지만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고 어느 면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해서 미운 존재. 우리 모두 삶 속에서 그런 사람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특히 강이나가 윤진명을 보며 느낀 감정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부러워서 싫어. 가난하고 괴팍하고 깡마르고 볼품도 없으면서 날 초라하게 만들어서 싫어. 질투 나게 만들어서 싫어. 너처럼 되고 싶은데 너처럼 될 수 없으니까. 미워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냄새가 나는 거야.
내 질투에선 썩은 냄새가 나.
강이나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윤진명도 마찬가지. 그러나 둘이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나도 달랐고 강이나는 비슷한 상황이지만 자신보다 열심히 사는 윤진명을 동경하면서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이나에게도 사연이 있었으니 이 사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어떤 ‘사건’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만든다. 그래, 이런 삶도 있을 수 있다. 죽을뻔한 위기에서 남의 목숨을 빼앗아 살아남은 삶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삶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어차피 언젠가 우리는 저번처럼 허망하게 죽을 운명인데. 그래서 강이나가 선택한 생존전략은 저비용 고효율. 그러나 과연 강이나가 진정 자신의 삶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을 살게 했던 그 팔찌를 부적처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팔찌를 부적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한, 자신의 삶은 살아남아야 하는 어떤 필사적인 이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윤진명을 통해서 더욱 명확해지며, 때문에 어딘가를 가려하니까 길을 잃는 거라고 생각했던 강이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며 가슴 아파했던 인물이 바로 윤진명일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윤진명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돈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가족에게 치이는 그런 거 말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채로 인간다운, 최소한 평범한 삶이라도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새부턴가 윤진명은 평범하다는 것이 꿈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다. 이 시대에 어떤 이들은 평범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장래희망이다. 허나 그 평범함 또한 세상은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근데 그거 알아요?
희망은 원래 재앙이었다는 거.
일터에서는 직장상사의 성추행이 윤진명을 괴롭히고 (이 사건은 진명이가 강이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된다) 합격할 거라 믿었던 회사의 최종면접 탈락은 진명이가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끈마저 끊어버렸다. 사랑은 진명에게 사치였고 가족은 진명과 가족 모두에게 짐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먹구름 안에만 있을 것 같았던 진명이가 서서히 햇빛을 보게 되는 것 역시 가족으로부터였다. 그래서 결말에 모든 짐을 덜어버리고 한결 가벼워진 진명이가 중국으로 떠나며 드라마가 마무리되는 것이 더욱 다행처럼 느껴졌다. 진명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부디 진명이가 중국에 가서 얻고 돌아오는 것이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송지원과 정예은은 너무 아쉬운 캐릭터들이다. 분명 이들도 앞의 세 명 못지않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 예를 들어 송지원이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와 에필로그에서 나왔던 효진이의 존재, 정예은의 경우 쌍둥이 언니로 인한 집안에서의 열등감 같은 것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정말 아쉬웠다. 물론 시즌2가 있으니 아마 거기서 다룰 테지만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본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으로서는 한 드라마에서 이걸 다 다루지 않고 다음 시즌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조금 치사하다는 느낌이었다.
어찌 됐든 그와 별개로 송지원은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밝은 에너지와 개그 코드는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때론 진지하고 지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반전 매력을 뽐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얘기가 정답은 아니라도 사람마다 죄다 사정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그 사정 알기 전까진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거고.
게다가 극 안에서 중립자의 입장으로 서로를 조율하고 중재하며 거짓말로 귀신까지 등장시켜 벨 에포크를 뒤집어 놓았으니 말 다했다. 존재감으로만 따지면 단연 1등이었고 시즌2가 더 기대되는 인물이다.
정예은은 요즘 들어 더 심각하게 문제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로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주로 사랑과 연애에 초점을 맞췄던 인물이다. 아마 작가가 힘주어 말하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가 이 데이트 폭력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이 드라마가 보여줬다. 항상 밝고 귀여운 이미지를 보여줬던 정예은이 시즌2에서는 어떨지, 또한 그녀의 집안 배경이나 속사정 같은 것도 시즌2에서는 기대해볼 만하다.
청춘시대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삶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잘 엮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개성 넘치는 각자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나 그들의 심리묘사도 탁월해 시청자들이 더 잘 몰입할 수 있었다. 하나 아쉬웠던 것은 역시 너무 짧았다는 것. 물론 이것은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겠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를 뜻한다고 한다. 그것도 과거의 지난 시절을 칭한다고 하는데 그 뜻이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사는 시간보다 이전의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경향이 있어서 청춘시대라는 것도 결국 미래의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정말 열심히 살았고, 힘들었지만 함께여서 버틸 수 있었던, 함께여서 더욱 즐거웠던 그 시절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지나왔을까. 행복했던 시간을 그때 당시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깨닫는 건 인간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청춘시대> 마지막 화의 제목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 칠판에 쓰여 있는 글씨는 “다시, 벨에포크로”였다. 이렇듯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청춘시대는 아주 가버린 것이 아니라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나간 시간들을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우리는 다시 벨에포크로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