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몰라,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아빠와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렇게 마무리되곤 했다. 아빠는 딸과는 아주 달랐다. 아빠는 마음먹은 일을 미룬 적이 없고, 집 안에서 빈둥거리거나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다. 아빠는 늦잠을 자는 일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밤에 늦게 자는 일도 없었다. 아빠는 자의적으로 끼니를 거르거나, 야식을 먹거나, 군것질을 하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딸과 정반대였다. 딸은 아버지처럼 살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딸이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이 아빠럼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딸도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영자신문을 읽거나 영어뉴스를 듣고 싶었다. 딸도 눈뜨자마자 일 분 일 초를 허투루 쓰지 않고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딸도 군것질 대신 건강식을, 야식 대신 아침을 챙겨먹고 싶었다. 아빠처럼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창피함과 반성은 애꿎은 타박으로 나타났다.
회사에서 승진이 밀리거나 공부하던 시험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아빠는 늘 정공법을 가르쳤다. 네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아빠도 학원 하나 없는 시골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군분투해서 이만큼 왔으니까. 아버지 세대를 관통하는 삶의 논리란 그런 것이었다. 땀과 노력, 근면과 성실. 그렇게 해서 맨주먹으로 무언가를 이뤄온 아버지는 이미 당신보다 이만큼이나 앞선 출발선에서도 전력질주를 하지 않는 자식들이 안타깝다. 근성이 부족해서라거나, 배가 불러서라고 생각한다. 전쟁의 폐허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던 시대의, 세 끼를 먹는 것이 드물었던 세대의 이야기다.
우리 세대의 삶에서 보편화된 가치는 그와는 달라졌다. 연봉보다는 복지와 워라밸을, '피, 땀 눈물' 보다는 삶의 여유를 추구한다. 80년대생인 딸의 눈에는 90년대, 2000년대생들도 판이하게 다르다. 옷을 입는 방식도, 추구하는 가치관도, 삶의 목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세대의 가치가 다른 세대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시대와 다른 환경을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딸은 아빠의 치열함을 닯고 싶다. 아빠의 근면함을 배우고 싶다. 아빠가 힘겹게 일궈내어 눈물겹게 쌓아올린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딸은 너무나 고스란히 누렸다. 아빠의 실패, 좌절, 눈물을 딸은 모두 보았다. 아빠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도 모두 보았다. 아빠와 같은 환경에 처했더라면 딸은 아빠같이 할 수 있었을까. 딸은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아빠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대를 방패삼아 변명하기에는 너무 비겁하다. 딸은 그저, 그만큼 단단하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은, 아빠와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아니다. 아빠의 말도, 아빠의 삶도, 모두 이해된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래서 아빠와 말을 하기 두려운 것이다. 아빠를 더 실망시킬까봐. 아빠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이 무안해서.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안 통하는 것이다. 아빠만큼 열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뤄보고 싶다. 아빠처럼 촘촘히 삶을 살아내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아빠의 삶을 따라하면, 언젠가는 아빠와 말이 통할 수 있을까. 마흔이 된 딸은 그 동안 읽었던 무수한 자기계발서 대신에 아주 쉬운 삶의 표본이 옆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공짜로 배울 수 있는 삶의 기회들을 사십 년간 흘려보낸 뒤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