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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20. 2022

시간이 많아서, 시간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딸의 기억은 팔할이 엄마였는데, 조금씩 아버지의 지분이 많아진다. 아버지는 말수가 많지 않았는데 엄마 말로는 “노인네가 되어서” 말씀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이 분비가 줄고 여성호르몬 분비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감성적이 되고 대화 욕구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자기 수다스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할 말이 없어 잠자코 계셨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자라는 동안, 학창 시절 무수한 입시와 시험을 반복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취직 준비며 생존을 위한 각종 과정이며 공부에 매진하고, 집에 와서는 "엄마, 밥!"을 외치는 자녀들로 살아오는 동안, 아버지는 아버지의 말을 할 시간도, 들어 줄 사람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치고, 고단하고, 힘겨웠기 때문일 게다. 아버지 홀로 가족을 등에 업고 세상과 맞서느라 힘겨웠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 게다. 맞벌이가 많아진 세상이지만 딸이 자랄 때는 외벌이가 흔했다. 밥벌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돈을 벌어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일터에서 돌아와 도착하는 집이라는 공간, 가족이라는 집단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직장을 다녀보기 전에는 오롯이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궤적과 무게는 훨씬 길고 무거울 것이었다. 지금 딸과 사위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이미 가장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밥을 굶을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의 행운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가 온몸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춧돌이자 대들보이자 지붕으로 버티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뛰노는 우리는 아버지에게 귀 기울일 줄도, 속삭일 줄도 몰랐다. 서운한 소리 할 줄 모르는 아버지지만, 마음 속에는 내색하지 못한 외로움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삶의 피로와 때로 느꼈을 사회의 치사함과 치졸함, 때로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출근길과 모든 힘이 소진된 퇴근길. 아버지 역시 자신의 가장 가깝고도 끈끈한 피붙이인 자식들을 말동무 삼아 하루의, 혹은 인생의 회포를 풀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딸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은 아버지의 몫이 절반이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면 엄마와 딸이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틈도 없었을 것이다. 딸은 밥벌이를 해 보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지난날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 없이는 불가능했을 엄마와 딸, 아니 가족의 공생. 감사함은 선뜻 입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마음 속에서 맴돈다.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막상 갑자기 살갑게 굴기에는 머쓱하여 괜시리 용건 없는 말들만 둘러댄다.


아버지 세대의 아버지에게 가족은, 자녀는 참으로 불공평하다. 정서적인 유대감은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한다.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집 안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유년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도 적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야말로 가장 큰 짐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보니 동년배 아버지들의 삶은 대개 비슷했다. 가족 구성원들이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끼리 말을, 마음을 나눈다. 말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서툴고 낯선 아버지들은, 가끔은 술과 안주가 필요하고, 취기를 빌린 다정함이 필요하다. 어색하고 쑥스럽더라도 우리는 아버지와의 시간을 최대한 많이 나누고 남겨야 했다. 아버지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해진 시기는 사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기에. 이제서야 아버지와 대화의 물꼬를 트며, 생각한다. 아버지 몫의 지분과 공로를. 아버지가 스스로 주장하지 못했던 당연한 것들을. 아버지에게는 이제서야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 딸은 자꾸만 시간이 없어지는 것 같아 조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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