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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05. 2022

훌륭한 사람

아버지는 퇴근이 늦었다.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기다리면 늘 9시 정도가 되었다. 때문에 딸은 야식을 먹는 습관이 식탐 때문이 아니라 어릴 때의 식사 시간에서 기인했다고 변명한다. 어릴 때 딸은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며 종종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돈을 벌지 않으면 우리는 어떡하지? 지금 먹는 이 밥을 못 먹게 되나? 그럼 우린 갑자기 굶어야 하나?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오는 아버지는 나처럼 늦잠도 못 자고 간식도 못 먹고 힘들겠다. 대여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를 편하게 해 드려야지. 중학생 무렵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딸이 유난히 효심이 지극하거나 철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진작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그 무렵 나라에는 IMF 위기라는 것이 덮쳤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채 모르던 시절이지만, 많은 아버지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힘겨워하는 것을 목도한 자녀들이 공통적으로 했을 생각. 그 해 겨울 교실 창가 라디에이터 앞에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쬐며 이야기했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 아빠를 호강시켜 드려야겠어.

 

이제 딸은 마흔이 되었고, 아버지는 칠순이 훌쩍 넘었는데 딸은 아직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훌륭한 사람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아직도 후렴구처럼 “아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아빠 호강시켜 줄게”를 반복하면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한다.

“너는 먼저 사람이 되어라. 아빠 뭐 해 줄 생각 말고 근검절약하고.”

 평생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소비해 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딸이 스스로를 위해 지출하는 그 많은 항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옷장에 옷이 저렇게 많고 신발장에 신발이 저렇게 많은데 대체 왜 옷이, 신발이 더 필요한지. 딸은 항변하지만 내심 뜨끔하다. 아버지가 옳다. 만약 딸이 이 돈으로 4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호강’은 물질적인 것이 아님을. 딸이 제 자리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 어디 나가서 손가락질 받거나 빈축사는 일 없이, 남에게 폐 끼치거나 피해주는 일 없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 딸의 아버지라는 사실만으로 아버지가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 너무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남들에게 인색하며 뒤에서는 욕을 먹을지언정 아버지에게 값비싼 선물이나 안겨드리는 것이 쉬울텐데. 아버지가 생각하는 ‘사람’의 기준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훌륭한 사람’의 허들을 넘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일이다.

 

너는 뭐가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

사재기 그만해라. 나중에 그 물건 다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아버지의 후렴구는 이런 것이었다.


아버지 혼자 온전히 짊어지고 왔을 가장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딸은 가늠조차   없다. 결혼 전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 나가면 간혹 맞벌이 여부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떠밀지 않아도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과, 나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우선인데 하는 걱정 사이에서 아직도 갈팡질팡하지만  주장과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살기 팍팍해진 시대에, 누군가의 귀한 아들들인 그들에게 삶의 무게를 전부 떠맡길 마음은 없기에. 그런데 그럴수록 아버지의 야윈 어깨가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가벼운 어깨로  가족의 삶을 모두 혼자 지탱해  아버지가 생각나, 평생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만 같아, 딸은 자꾸 어깨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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