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언어
어릴 때 드라큘라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드라큘라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어두운 밤에 활개를 치고 나타나는 흡혈귀의 잔상은 계속 기억에 남아, 불을 끄면 갑자기 나타날까 밤에 불을 끄지 못했다. 그 때 방에는 세계 명화 그림으로 만든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그 달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였다. 세계적인 명작이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저 어두컴컴한 배경에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체 모를 여인일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오싹했다. 필시 저 여자가 그림 속에서 스르륵 나와 드라큘라 여인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전등이 꺼지면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동안 들었던 모든 무서운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잠이 들지 못하던 아이가 새벽까지 고심하던 끝에 고안해 낸 방법은 이 여인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숨을 쉬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거야. 드라큘라도 숨을 못 쉬면 깨어나지 못할 거야. 당시의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었다. 아이는 모나리자 그림의 콧구멍 부분을 스카치테이프로 여러 겹 꼼꼼하게 밀봉해 놓았다. 이렇게 하면 그림 속의 여자가 숨을 쉬지 못하겠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드라큘라가 사람과 같은 호흡기와 신진대사를 가졌는지 어찌 알겠는가? 숨을 쉬지 못해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는 다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애꿎게 아이가 잠들 때까지 옆에 누워 기다려야 했다.
“아빠가 드라큘라 이겨?”
“그럼, 아빠가 싸우면 다 이기지.”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빠가 전에 드라큘라랑 싸운 적 있는데 아빠가 다 이겼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어디 가면 안 돼.”
“그럼, 아빠 여기 있으니까 얼른 자.”
그제서야 아이는 잘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생각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빠는 그 때에나 지금이나 싸움이라곤 할 줄 모르고, 뼈대도 가늘고 야위어서 정말 드라큘라가 망토자락 한 번만 펄럭여도 나뭇잎처럼 저만치 날아갔을 것이다. 싸우기는. 딸은 피식 웃는다. 그래도 아빠의 큰소리 덕분에 어린 날의 딸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칠순이 넘고 머리가 하얗게 센 지금도 그렇게 큰소리를 친다. 아빠가 다 할 수 있다고.
이제 딸은 속지 않는다. 아빠는 말로만 다 한다고 놀린다. 그래도 실은 아빠가 계속 큰소리를 치면 좋겠다. 아빠가 갑자기 겸손해지고, 아빠의 부족을 인정하면 갑자기 아빠가 늙어 보일 것만 같다. 아니, 아빠의 늙음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다.
아빠, 어디 가면 안 돼.
이렇게 말할 수 있던 날들이 지났다는 것. 아빠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 누군가 있다면 그것은 아빠가 아닌, 배우자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딸은 이제야 알겠다. 아빠가 누군가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며 하고 싶은 말이 아마 이것일 거라고. 자네, 어디 가면 안 되네. 딸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어디 가고 싶지 않을 사람. 기쁨은 누구와 함께해도 기쁘기 마련이지만 힘든 일은 누구와 함께하는지가 너무 중요한 걸 알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하다. 사실 보통은 그 한 명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딸은 힘들게 찾은 그의 손을 잡고 속삭일 참이다. 당신, 어디 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