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글은 많이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내 이야기에서 소외되었다. 아버지는 엄마에 대한 보조, 혹은 부연으로만 등장했고, 단독 주연으로서 조명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마음은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실질적 접촉이나 대화의 기회는 엄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늘 집에 상주하는 엄마에 비해, 퇴근 후와 주말에만 허락되는 아버지와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기억의 양은 이야기의 양에 정비례한다. 적어도 내 세대나 혹은 그 이전 세대에서는, 대부분의 자녀들에게 대부분의 아버지가 이와 같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시대에는 주 5일 근무제나 주 52시간 근무, 워라밸, 소확행, pc off 같은 것은 생경한 용어들이었다. 일과 가족의 저울에서, 아버지의 무게추는 항상 일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데 주 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내가 대학교에 막 입학한 무렵이었고, 당시에도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우리 경제 규모에 아직 주5일 근무제는 시기상조라는 주장과, 주5일로도 생산성과 근로자의 복지 두 마리 토끼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양쪽의 주장이 모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결국은 주5일 근무제가 승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주4일 근무제에 대한 논의도 수면위로 오르는 것을 보면, 당시 주5일 근무제의 도입은 논리의 승패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한창 직장에서 열정적으로 일할 나이를 비켜난 시점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건강이 예전같지 않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집에 머무는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단둘이 있으면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때의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에게는 이미 완벽하게 갖춰진 내 인생의 무대장치가 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드라마로 친다면 기획의도와 등장인물, 주변인물, 줄거리를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개별적으로 설명해서는 유기적 연결관계가 미흡했고, 요약해서 설명해서는 충분한 인과관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처음부터 셋업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품고 있는 걱정이나 고민, 아버지가 나누고 싶은 기억이나 가치를 이야기하기에는 한 집에 산다는 것 외의 교집합이 턱없이 적었다. 다른 듯 닮은 아버지와 딸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보다는 입을 다물고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흘러가는 셈이었다. 엄마와 딸은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로만 존재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의 연장이고, 내 이야기는 엄마의 역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딸은, 왜 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심했던 것일까.
지금의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같은 엄마가 되고싶어 하지만, 현실은 아버지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가 굳게 지켜왔던 노력과 땀에 대한 믿음, 소속된 조직에 대한 성실함과 충성심, 가족과 일의 경계선에 서 있는 시간들. 직장에서 있었던 일은 엄마에게 이야기하지만, 직장에서의 삶은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가게 될 때가 많아진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싫은 사람이 있을 때, 경력이나 업무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가족들에게 터놓고 얘기할 수 없었을 아버지가. 가끔 신세한탄을 하거나 넋두리를 하거나 울분을 토하고 싶어도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꾸역꾸역 삼켜야 했을 아버지가. 그렇게 키웠어도 아버지가 뽀뽀를 하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던 사춘기 딸이 서운했을 아버지가.
자기 일이 있는 많은 요즘의 딸들은, 엄마보다는 아버지와 더 닮은꼴의 삶을 살고있지 않을까. 딸들과 그림같은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들도 많아지고, 엄마보다는 아버지와 더 친한 딸들도 많아진 요즘이지만 나의 유년에 아버지는 주변인으로만 등장했던 기간이 제법 길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이나 새벽에 식탁에 홀로 앉아 영어공부를 하던 아버지. 딸에게 이메일 계정 만드는 법을 묻던 아버지. 딸이 졸업식에 늦었다고 발을 동동 구를 때 어떤 총알택시보다도 빠르게 달려 기적적으로 졸업식장에 도착하게 해 주던 아버지. 지금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해서는 안부를 확인하고 1분도 되지 않아 끊어서 대체 이럴 거면 왜 전화를 했는지 의아하게 만들던 아버지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마음을 보이기에 아버지의 언어를 알아듣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의 언어에 익숙해지고 나자 아버지가 그 동안 전해왔던 이야기가 와락 몰려와, 딸은 자꾸 먹먹하게 이야기를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