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공을 드리블하면 무겁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 우레탄 바닥은 신발과 마찰을 일으키며 삑삑 소리를 낸다. 슛이 들어갈 때 다른 스포츠와 다르게 그물망이 뚫려있어 서걱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들은 10대의 내가 유일하게 빠져서 하던 스포츠, 농구의 소리다.
10대의 나는 점프와 달리기는 잘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고 순간동작이 느린 데다 빠른 공을 무서워해서, 다른 여타 단체 구기종목을 잘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만화 잡지 소년 챔프에서 <슬램덩크> 연재를 시작했다. <슬램덩크>는 학원폭력물과 개그물이 적절하게 섞인 스포츠만화였다. 생소했던 농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삽시간에 아이들에게 퍼졌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마이클 조던의 NBA붐과 함께 농구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때 만들어진 놀이터에는 꼭 농구 골대가 세워졌고, 성당 주차장에도 농구 골대가 들어섰다.
학업과 가정의 스트레스를 다 풀기 힘들었던 나는 농구에 매달렸다. 더군다나 한 살 위의 사촌형은 갑자기 키가 15센티나 커서, 나를 내려다보며 농구를 가르쳤다. 사촌형의 엄마, 즉 고모는 고등학교 국가대표 농구선수여서 농구를 제대로 배웠다. 농구공은 크고 공은 빠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농구를 잘할 수 있었다. 농구를 하는 동안에는 룰 안에서 친구들과 부딪히고, 육체의 기술과 한계를 겨룰 수 있었다. 농구로는 그럴 수 있었다. 반에서 농구를 잘하는 친구에게 아침마다 찾아가서 농구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빌라 안에 있는 시멘트 공터, 반코트짜리 농구 골대, 그곳에서 단 둘이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농구를 즐기고 배웠다.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시절 농구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가진 모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만화책과 TV판 애니메이션의 괴리
<슬램덩크>는 완결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항상 일본 만화 순위 최상위권에 위치하는 인기만화다. 실제 농구 경기를 뛰는 듯한 농구 경기의 묘사가 탁월하고, 특히 만화 안에 들어있는 청소년이나 가정의 서사가 한국과 비슷해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슬램덩크>가 인기 있던 이유는 단지 그것뿐은 아니다. '만화적'인 연출을 정말 제대로 해낸 만화이기 때문이다.
'만화(comics)'는 두 개의 장면 이상을 나열해 만드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다. 동양에서는 한 컷도 '한 컷 만화'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Cartoon이라고 부른다. 두 컷 이상 연결된 만화는 컷과 컷 사이를 건너가는 동안 뇌에서 시각적인 연결성이 일어난다. 뇌는 어떤 정보와 정보 사이가 띄어져 있을 때 그것을 스스로 메꾸게 되는데, 연출이 잘 되어있는 만화의 컷과 컷은 그 사이가 움직이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칸의 위치, 전체 페이지에서의 배분, 컷 안에서의 구도 등등 모든 총체적인 합이 잘 이루어지면 독자는 그 안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세계를 구현한다.
컷이 크고 묘사가 사실적이고 세밀해서 자칫 정적일 수 있는 만화를, 적절한 연출로 극대화시킨 게 만화 <슬램덩크>다. 요새 한국 웹툰의 연출력은 스크롤방식 때문에 변화했다고는 해도 90년대의 일본만화에 많이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긴 스크롤을 이용한 창의적인 연출은 몇몇 웹툰에서는 감탄할 정도지만 나머지는 예전 출판만화라면 연재하지도 못할 수준의 연출력이 많이 보여 안타깝다.
최고의 스포츠 만화 연출력을 보여주는 <슬램덩크>. 시선의 흐름과 캐릭터 동세나 공이 움직임이 일치해서 실제 경기를 보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다.
만화 <슬램덩크>의 연출에 대해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만화책의 연출과 애니메이션의 연출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둘을 같은 사람이 연출했을 때, 만화와 애니메이션 둘 다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성공적인 유명한 사례는 <아키라>의 오토모 카츠히로다. 오토모 카츠히로는 진정한 완벽주의자인 게, 만화책 아키라가 여러 가지 판형으로 나왔을 때 판형과 권수 나눔에 따라 각각의 컷 크기와 배분, 위치를 조금씩 다르게 다시 편집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때는 만화책의 긴 내용을 압축하고 필요한 이야기들만으로 구성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극대화시켰다. 반면 한국에선 이현세 등이 직접 감독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이 있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작화가 떨어지는 TV판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슬램덩크>가 tv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때, 원작가인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제작비와 기술력을 생각하면 자신의 만화를 tv 애니메이션으로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사실 인기에 편승해 급하게 제작이 결정되었고, 퀄리티를 보장하기 힘든 tv판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 좋지 않았다. 원작자는 제작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만화책 초중반의 작화를 그대로 가져다 만들었는데 그마저도 작화 붕괴가 심했다. 농구라는 스포츠의 재미를 살린다기보다는 만화에 나오는 장면과 대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며, 제작비 절감을 위해 정지. 반복동작에 움직이는 배경효과를 활용한 고전적 일본 애니가 탄생했다. 한국에서는 SBS가 <피구왕 통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 야침 차게 내놔서 많은 사람들의 추억의 애니가 되었지만, 만화책을 기억하는 세대는 애니를 즐기기 힘든 사람들도 많았다.
"이건 슬램덩크가 아니야!"
하지만 이번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러한 TV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작 만화책에서 느낄 수 있던 리듬감을 그대로 살려 현장감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탁월한 리듬감을 가졌고, 그것을 여러 매체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작 만화가가 애니메이션 감독까지 맡아서 성공적으로 완성한 몇 안되는 사례인 셈이다.
미완의 걸작
일본 만화책을 자주 보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적당한 길이에 완벽한 결말'을 만드는 만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기가 폭발하면 그것과 관련된 파생 상품들이 줄을 이어서 출판사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서 그리길 원한다. 지역 중심이던 만화가 전국을 무대로, 세계를 무대로 나오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시마 과장>은 지금 <시마 사외이사>를 연재 중이다. 유리가면은 다시 연재중단, 원피스는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태. 작가가 의지만 있다면 100권을 넘는 일도 꽤 있다.
아마 <슬램덩크>역시, 그런 제안이 들어왔을 거다. 그래서 전국대회편이 나오면서 여러 캐릭터들을 밑밥으로 깔아 두고, 특히 샤킬 오닐을 벤치마킹한 '김판석'은 산왕전에서도 주요 리액션을 보여주는 '전국대회 끝판왕'캐릭터다. 하지만 작가는 산왕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후, 경기가 끝난 바로 다음 회에 연재를 종료했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농구만화만 그려야 하는 미래'가 눈에 선했을 것이다. 연재 초기에 신인이자 아직 만화가로서 여물지 않았던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시간이 흐르면서 산왕전 즈음에는 작가주의 성향이 짙은 만화가로 성장해 있었다. 농구경기 외에는 점점 더 느리고 정적인 연출이 잦아졌고 감성적인 회상을 넣는 구간이 많아졌다. 그것은 그가 농구 이외에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음이 역력한 부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슬램덩크> 연재종료에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팬들은 허탈하거나 분노하고 상처 입었다. 누구도 그걸 '완벽한 끝'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그때 끝내지 않았으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점은 그 이후 그린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다른 작품들 <버저비터>, <배가본드>, <리얼>은 전부 그런 마무리조차 안 한 상태다. 사실 이 작가가 '장편의 마무리'라는 것을 제대로 할 역량이 있는 사람인가 의문이 들 정도다.
그 뒤에 1억 부 돌파 기념으로 각 신문사에 캐릭터 전면 얼굴 그림과 함께 짤막한 대사를 광고로 내보낸다. 그리고 그 호응이 좋아서, 뒤에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라는 이벤트를 한다. 폐교를 빌려 칠판에 뒷이야기를 그렸고 3일 동안 와서 보라는 이벤트였다.
당시 신문사에 게재된 캐릭터별 광고.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칠판그림. 엮어서 책으로도 판매되고 있다. 작가의 사정이 어떻든, 슬램덩크는 갑작스레 끝을 맺은 게 분명하다. 게다가 TV 애니메이션은 작가가 관여하지 않았다. 너무 빠른 영상화로 인해 전국대회 편은 나오지도 않고 끝나기도 했고. 모든 이별에는 마무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갑작스레 찾아온 슬램덩크와의 이별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감독을 맡아 진행하는 극장판 이야기가 들려왔다. 현재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이면 분명 그의 그림체로 농구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넷플릭스를 휩쓴 <아케인>만 보더라도 게임 일러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더 퍼스트, 그러나 더 라스트.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이 애니메이션을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고 이름 지었다. 거기엔 '원작자가 제대로 만든 첫 애니메이션'이나 '제일(第一)의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슬램덩크> 팬들에게 보내는 제대로 된 마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책의 가장 마지막 경기인 산왕전을 다루었다. 산왕전은 주인공 강백호와 서태웅, 채치수와 정대만, 송태섭의 모든 이야기가 폭발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보고 나면, '이 전 경기나 이 이후에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사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작가는 산왕전을 골랐다.
그리고 산왕전을 다루면서, 만화책에서 전국대회 빌드업을 위해 등장시킨 모든 캐릭터들을 다 빼버렸다. '김판석'은 물론이고, 바로 다음상대인 지학의 별 '마성지'를 비롯한 기타 등등 각 학교의 에이스들. 작가주의 성향이 짙어진 지금의 작가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다 싶은 부분은 들어내버렸다. 또 예전의 애니메이션을 몰라도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이전부터 이어지는 서사나 개그도 과감하게 배제해 버렸다. 그리고 송태섭의 서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바꾸면서, 원작의 팬과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했다.
송태섭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이전에 단편 <피어스>를 통해서, 송태섭과 이한나가 해변의 동굴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다. 송태섭이 그때 이한나가 버리려던 피어싱을 주워와 귀를 뚫게 되는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중학교에 올라가자 왜 한쪽 귀에 피어싱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생각보다 송태섭과 이한나의 인연이 깊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작가로서 더욱 성장한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그 이후 여기저기 뿌렸던 떡밥이나 서사를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보다 보면 원작 팬들은 만화책에 등장한 명대사나 재미있는 부분들이 축소되거나 없어져서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퍼즐처럼, 만화책에선 미처 다루지 못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맞춰준다. 만화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던, 주장인 채치수가 2학년 일 때 북산의 3학년 주장이 나온다. 이 캐릭터는 조금 뜬금없지만 어째서 송태섭도 있었고 채치수가 2학년일 때 그렇게 형편없는 팀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그렇게 만든 이유는, 마지막 산왕전을 진짜 농구경기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스포츠 만화라는 건 캐릭터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경기 그 자체가 극적이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인데, 정말 최고의 극적 장면들로 경기를 만들어 놓고도 그걸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처럼 만든다면 그 맛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작가이자 감독인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이걸 완벽한 경기로 만들고 싶어 한 욕심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빠질 수 없는 깨알 재미들이 있다. 관객석에 잘 찾아보면 변덕규가 앉아있다던지, 엄청난 블로킹을 해서 손이 찌릿하던 강백호에게 채치수가 하이파이브를 해서 강백호 손이 뻘겋게 부어 뛰어가는 장면이라던지, 북산과 산왕 캐릭터들이 서로 흥흥 거리며 신경전 하는 모습 말이다.
무엇보다 그걸 보고 싶었다. 강백호가 리바운드하는 엄청난 모습. 빠르고 높이 뛰는 그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정말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24초. 그것은 스포츠 만화에 길이남을 명장면인데, 그것을 애니메이션과 만화책 그림이 겹치면서 만화책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누구라도 그 장면에선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시작부터, 캐릭터들이 연필로 그려지며 걸어 나오는 인트로는 '추억의 만화가 살아서 스크린으로 걸어 나오는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모습들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안녕, 슬램덩크여
애니메이션의 구성이나 작가의 완벽주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이후에 더 만들 것 같지 않다. 이제야 비로소 슬램덩크는 끝을 맺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노우에 타케히코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최선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슬램덩크>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끝났고 거기에 슬퍼하거나 놀란 분들도 계신 걸 잘 알고 있다. 늘 그런 분들께 보답하려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씨네 21)'
송태섭과 그의 가족들은 맏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자들에게 슬램덩크는 그런 작품이었다. 한참 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나에게 꿈과 행복과 위로를 주었던,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끝나버린 가족과 같은 작품. 몇 년이나 흐른 뒤에 송태섭의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이별에는 그것에 걸맞은 계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왜 굳이 송태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넣었을까. 관객들이 이제 <슬램덩크>의 완결을 받아들이고 보내기를 바라고 넣은 것은 아닐까.
추억은 추억으로, 이별은 이별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나 역시 그 멋진 경기들을 보며, 추억이 한켠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완벽한 끝이었다는 것을 이제 느끼며, 내 소년시절을 함께한 <슬램덩크>의 완결을 인정하고 보내려 한다. 그래서 <은하철도 999> 마지막 철이의 내레이션을 빌어, <슬램덩크>에게 잘가라고 말하고 싶다.
안녕, 강백호.
안녕, 슬램덩크.
안녕, 내 소년의 날이여.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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