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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오트리 Mar 25. 2024

작고 동그랗고 짤랑대는

마트에서 동전 사용기



외국에서 그곳의 화폐를 능숙하게 계산하기란 달걀 프라이를 만족스럽게 해내는 일처럼 시간과 연습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특히 동전은 정말 쉽지 않은데, 되도록 셈을 피할 요량으로 금액을 크게 어림잡아 지폐로 값을 치르면 기어이 내 손에 그 작고, 동그랗고, 짤랑대는 성가신 것들이 되돌아온다.

집집마다 쌓여있는 동전 더미나 저금통이 꼭 하나씩은 있는 것을 보면 동전은 아마 그런 물건인가 보다.

똑 떨어지게 깨끗이 털어버리고 싶어도 어찌어찌 남아서 같이 가자고 들러붙는 소수점 아래 숫자들 같은.



페니                       니클                    다임                     쿼터

미국생활에서 주로 쓰던 동전들이다.

페니(Penny)는 1센트, 니클(Nickle)은 5센트, 다임(Dime)은 10센트, 쿼터(Quater)는 25센트이니

1 달러 = 100으로 봤을 때 이 조합으로 1 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지 많다.





새댁이자 외국생활을 갓 시작한 나에게 마트 가는 일은 일종의 언어와 수리 영역의 실전과도 같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서는 것도 잠시, 미국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나는 종종 길도 잃고 넋도 잃었다.

한국에 지금 같은 기업식 대형 마트가 생겨나기 훨씬 전이라, 동네 슈퍼임에도 대형 마트 수준에 약국, 베이커리, 델리에 화훼까지 갖춘(미국은 꽃을 사는 것이 일상적인 문화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와 구성에 압도당하였다.

또 사람들 평균 체격이 커서 그런지 머리 위로 우뚝 솟은 물건 진열대 높이에 위압감을 느끼곤 하였는데, 설거지할 때마다 몸소 느껴야 했던 싱크대 높이의 불편함, 딱 그 정도의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좌우 진열대 맨 위에서 아래까지, 마치 군대 대열처럼 가지런하고 빼곡하게 줄 맞춰 쌓여있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물품들.

플라스틱, 캔, 종이 박스에 담긴 온갖 식료품과 생필품으로 된 거대한 생존 장벽들, 그 표면을 유영하는 형형색색의 알파벳 물결 한가운데를 달각거리는 카트를 끌고 유유히 걸어갈 때면, 나는 왜인지 영화 “십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민족의 리더였던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자 바닷물이 좌우로 갈라지며 물벽을 세워 일으키고 군중들이 마른땅을 밟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너무 장엄한가? 먹고사는 것은 자고로 장엄한 문제이다! 아무튼!




90년대 말 당시, 사람들은 주로 물건을 살 때 현금과 은행에서 만들어주는 개인 수표나 데빗카드(지금 한국의 체크카드)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 미국은 그야말로 쿠폰의 나라였는데 "페니세이버(Pennysaver)"와 같은 지역 무료 광고지나 마켓에 비치된 전단광고지 등에서 필요한 쿠폰들을 잘라서 지갑이나 편지봉투, 아예 쿠폰 북 등에 돈처럼 넣어가지고 다니는 광경을 흔히 보았다.

물건을 고르다가 다른 쇼핑객들에게 필요 없어진 쿠폰을 나눠주거나 서로 교환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생경스러웠지만 여기도 우리 같은 인정이란 게 있구나, 사람 사는 곳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남편과 나는 시리얼 광이었는데 수십 가지의 시리얼이 놓인 매대에서 한참을 벗어나질 못했다,

특히 “블루베리 모닝”과 “캡틴 크런치”라는 시리얼을 즐겨 먹었는데, 지평선을 훌쩍 뛰어넘는 귀여운 얼룩소가 그려진 빨간 팩 우유를 함께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국 우유는 지방 함유율에 따라 종류가 다른데  유지방이 아예 없는 것은 스킴 밀크(skim milk), 꽉 들은 것은 홀 밀크(whole milk)라고 부르고 그 사이에 1% 밀크, 2% 밀크로 다양했다. 선택지가 많은 것은 흥미롭지만 괜히 몇 초, 몇 분이 지체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을 평생 모으면 몇 년은 족히 될 것이다.



차곡차곡 필요한 물품을 채워 담다 보면 어느새 카트가 한가득. 계산대로 향할 시간이 다가오면 긴장감이 돌고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실전이다!

이번엔 반드시 수중에 가진 동전들을 가장 깔끔하고 후회가 안 남도록 신속정확하게 지불해 보리라 다짐하며 줄을 선다. 계산하는 점원과 으레 인사를 나눌 것이고 바코드를 찍다가 “이거 안 먹어봤는데 맛이 어때?” 하고 말을 걸어올 수도 있지만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페니-니클-다임-쿼터, 1-5-10-25.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캐셔가 물건 하나하나 바코드를 찍고 지불할 총액을 말하면 나는 이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돈을 세기 시작한다.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고 여유 있게 기다려주는데도 나는 마치 모두가 나만을 주시하고 있는 듯 바짝 곤두섰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짤그락 짤그락 무슨 색 동전이 얼마짜리인지 구분이 안 가고 죄다 뒤섞여 버린다.

‘어... 85센트를 만들려면 이거... 이거?... 아 그리고....'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단념하고 캐셔에게 양손 가득한 동전 더미를 쑥 내밀었다.



“ 우 쥬 헬프 미 플리즈?”

“오 슈어~ 돈 워리”

활짝 웃으며 손에서 작고 동그랗고 짤랑대는 녀석들을 쏙쏙 쏙 골라가는 모습이 왠지 허탈했다.

참 쉽다. 쉬워서 좋겠다.



새댁의 달걀프라이 솜씨가 완벽해질 때쯤 한참 쌓인 동전더미만 들고 가서 능숙하게 장을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그때까지 페니-니클-다임-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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