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오트리 Mar 02. 2024

J. 패트릭과 J. 패트릭 주니어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맞는 초여름의 어느 날, 남편과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결혼선물로 받은 두어 권의 요리책을 의지해서 아주 기본적인 국과 반찬들을 해 보던 때라 아마도 그날 해 본 음식 맛이 어땠는지, 다음에는 무얼 좀 더하고 빼면 좋을지와 같은 요리 평을 하며 치우고 있었을 텐데, 찾아올 사람이 없는 우리 집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방 하나 짜리 스튜디오 아파트여서 현관 바로 옆에 부엌이 위치해 있었고 기다란 모양으로 자리 잡은 거실에 두 개의 책상과 식탁, 소파가 다 들어앉아 있었기에 집 안 어디에서도 노크소리가 분명히 들리는 구조였다.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부드러운 눈매, 좋은 인상에 미소까지 가득 채운 그는 남미 사람 특유의 엑센트를 지녔으며 호의 가득한 톤으로 자신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라고 소개하더니 우리 부부에게 커다란 도넛 박스를 건네주었다. 크리**크림 도넛이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어렵지 않게 사 먹을 수 있는 도넛 브랜드이지만 그 당시는 패밀리 비즈니스로만 운영하는 것을 철칙으로 했기에 세계 어느 나라에도 프랜차이즈 라이선스를 허락하지 않던 때였다. (그런 도넛을 새벽배송으로 내 집 문 앞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때가 올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우리가 살던 글렌데일이란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크리**크림 도넛의 지점 매니저로 일한다며, 퇴근길에 우리에게 줄 도넛을 좀 사 왔다고,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름은 J. 패트릭(실명을 거론해도 되는지 이제는 아쉽게도 허락받을 길이 없기에 그의 이름 첫 글자인 J로만 표기하기로 한다). 유명한 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할 법 한 꽤 익숙한 이름 두 개의 조합이었기에 쉽게 기억에 남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입은 더 버벅거리고 땡큐만 몇 번을 했는지… 그래도 처음 사귄 이웃이라 너무나 반갑고 신기해서 세상 밝은 얼굴과 목소리로 또 만나자며 굿 나이트 인사를 하였다.



받아 든 도넛 상자를 열었는데 가로 3줄, 세로 4줄의 12개 도넛이 상자 가득 줄 맞춰 앉아있었다.  이것이 미국의 스케일인가 아니면 우리 이웃의 스케일인가 했는데 살면서 알게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물건을 12개 단위로 묶어 더즌(dozen)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흔하다. 연필만 한 다스가 아니다. 도넛도 한 다스가 될 수 있다고 우길 수 있다. 시간대 별로 튀겨내는 갓 탄생한 도넛의 살아있는 향과 맛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또 반짝거리는 엷은 우윳빛 글레이즈의 영롱함을 잊을 수가 없다. 한 입 베어 물면 도넛의 겉을 둘러싼 얇은 글레이즈 막이 먼저 사삭거리며 부서진다. 또 쫄깃하면서도 폭삭 사그라들듯 퍼지는 도우의 맛이란!


 

며칠 뒤 우리 부부는 외출을 하다가 J와 그의 한국인 아내, 2살 남짓의 아들까지 세 명의 가족을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는 원래 아기들을 좋아하여 학생 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처음 보는 아기들을 만나면 무조건 손을 흔들고 들뜬 목소리로 반갑게 말을 붙이는 스타일이었기에 아기를 보자마자 흥분하였다. 아들이 있었냐, 몇 살이냐, 이름이 뭐냐 등 흥분해서 줄줄이 묻는데 '응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빠와 아기의 이름이 정확하게 똑같은 "J. 패트릭"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오류가 난 듯 꿈벅 거리는 우리 부부에게 아빠인 J는 자기 이름을 고스란히 따서 아들 이름을 지었다고, 대신 뒤에 주니어를 의미하는 JR을 붙인다고 했다. 신기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 유명한 외국인들 이름에서야 어쩌다 들어봤지만 그렇게 같은 이름의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내 눈앞에서 실물로 만나는 경험은 참 뭐랄까… 비현실적이었다.



J. 패트릭과 J. 패트릭 주니어.

이 두 명의 남자 사람인 J. 패트릭들과 같이 사는 그 옆의 여자 사람은 어떤 기분, 어떤 느낌일까 몹시 궁금했다. 이름을 부르면 남편과 아들이 동시에 쳐다보지는 않을까?

그 당시 나는 미술공부를 더 하려고 입학준비를 하던 때라 아기를 낳을 생각은 없었지만 나중에 아들을 낳아 남편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붙인다면 어떨는지. "내 이름은 ㅇㅇ이고 이 아이의 이름은 ㅇㅇ 주니어야".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To. 이국 땅에서 사귄 첫 번째 이웃, J. 패트릭에게.

모든 게 낯설었던 이방인인 나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어 준 당신에게 아직도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이제 20대 청년이 되어있겠죠? 어디에 있든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화목을 이루는 가족일 거라 생각해요. 따뜻한 마음 고마웠어요.





작가의 이전글 낯선 곳에서 ABC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