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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플래닛 Mar 30. 2022

아빠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잘 산다는 건 뭘까


부모님께서 내 이사를 도와주시고 딸 중국 가기 전 얼굴도 볼 겸 서울에 올라오셨다.

나는 이번 주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팀원들이랑 마지막 회식도 있고, 퇴사 남겨두고 대충 한다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 마무리는 잘하고 가려고 하루 종일 일하고, 이사 준비도 하다 보니 신경 쓸 것이 무척 많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 이사를 하며 느끼는 것은 짐을 싸 보면 자잘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인데, 부끄럽지만 그것들이 눈에 안 보여도 찾지 않을 것들인데도 못 버리는 나를 보며 내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하며 깨닫고 있다. 그렇게 짐을 싸다가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터질듯한 캐리어를 보며 그제야 "에라이~다 필요 없어!!!" 하며 다 휴지통으로 버려버린다. 이런 과정을 통해 버리는 것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제일 큰 짐은 옷과 책 들이었다. 책 욕심만 있어서 못 본 책들도 있는데 급히 좀 버리기도 해서 너무 아까웠다.

옷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닌데, 나처럼 매년 같이 혹은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캐리어로 이삿짐을 해결하길 원한다면 많은 게 분명하다. 싱가포르 살 땐 여름옷만 있었는데 이번엔 사계절 옷들이 있었으니 계절의 탓도 해본다.

이삿날 전까지 혼자 최대한 처리한다고 했는데도 정리에 젬병인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싸야 할지 몰라 쩔쩔매다가 엄마가 오셔서야 둘이서 빠른 손놀림으로 대충 버리고 싸고를 반복했다. 아빠는 옮길 짐들을 보고 입을 떠억 벌리셨다. 그러고는 너는 왜 매년 이사 다니며 난리냐고 한 마디 버럭 하시기도 했는데 본인도 가만히 다른 사람들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딸을 보며 부모로서 속상하시기도 한마음에 그러셨을 것이다.

헤아려보니 재작년이랑 올해 두 번째 부모님 도움을 받고 있다. 아, 부모님 댁에 잠깐 들어가기도 했으니 세 번째다. 나도 내 상황이 이런 걸 어쩌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 면목 없다. 한 마디 들어 드려야지.�



엄마, 아빠, 동생 덕에 이사를 잘 마치고 계획했던 근처 남한산성 모시고 가서 한정식으로 보양시켜드렸다. 아빠가 어떻게 남한산성 갈 거라고 하니 이십 년도 더 전에 가보신 곳을 우리 집에서 네비 없이 운전해서 찾아가시는 게 너무 신기했다. 아빠는 서울 살 때 진짜 자주 갔지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점심도 배불리 먹고 드라이브시켜 주신다며 퇴촌으로 가서 남한강 근처에서 커피 한잔하기로 했다.

날씨가 좀 흐려서인지 풍경들이 조금 칙칙해서 아쉬웠는데, 날씨가 좋았다면 강 너머에 산등성이에 집들을 보면 스위스를 연상시키는 풍경들이 나왔을 것 같다. 운전하다 보니 양평까지 갔고 멈추고 싶은 카페는 만나지 못해 결국 차 안에서 드라이브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다들 뻗었다.



동생의 만기가 다가온 뚜레쥬르 기프티콘을 쓰기 위해 엄마와 동생이랑만 잠깐 마실 나갔다.

커피를 한잔하며 어젯밤 아빠와 나누신 대화를 이야기해 주셨다. 아빠가 어쩐 일인지 잠 못 이루시고 새벽까지 뒤척이시며 엄마한테 말을 많이 거셨다고 한다. 쟤는 어쩌려고 무작정 회사 그만두고 저러냐고 엄마한테 하소연을 하셨는데, 엄마는 아빠가 할머니 말 안 들으시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하시며 살아오셨듯이 똑같은 거라고, 쟤도 잔소리해도 안 바뀔 거라고 하셨단다. 아빠는 할머니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하시며 큰 딸이 잘 살았으면 좋겠으니까 그런 거라고 하셨고 엄마는 꼭 좋은 회사 다니고 좋은 집 사는 게 잘 사는 게 아니라고 하시며 잘 사는 게 뭐냐고 되물으셨다고 한다.

나 대신 나의 마음을 대변이나 하듯 아빠께 이런저런 말씀해 주셔서 엄마께 어찌나 감사하던지 -

엄마와 동생과 얘기하며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겠지만 잘 산다는 게 뭘까, 꼭 직장에서 승진해서 돈 모아서 대출받아 좋은 아파트 사는 게 정답은 아닐 거라고 했다. 엄마랑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잘 사는 것은.... 아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사는 게 아닐까 싶은데, 내가 깨달았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데 하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시는 아빠의 진심을 알고 난 후 동생과 호텔을 나서며 엄마를 자연스럽게 안아 드리고 아빠도 안아 드렸다.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아빠를 안아본 것 같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잘 살거니까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cover photo by Mohamed Aww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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