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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07. 2021

신명 나게 놀아봅시다



 구십 년대 후반은 스마트폰도 구형 폴더폰도 없는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시대였. 당시는 최첨단 문물의 대명사인 컴퓨터와 마이마이가 점차 보편화되는 시기였지만 시골 동네에서는 여전히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옛집에는 배불뚝이 테레비가 대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쓰시는 안방과 제일 끝방인 상방에 자리했다. 밀러드는 손님을 대접하는 안방에서 드러누워 티비를 시청하는 건 언감생심, 더욱이 말단인 나에게 채널 선택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상방에서는 원하는 프로를 고를 수 있었지만 나오는 거라곤 나이 지긋한 어르신 취향의 공영방송뿐이었다. 화면에는 똑같은 내용의 뉴스가 앵커의 얼굴만 바꿔가며 끊임없이 반복됐다. 리포터가 전하는 실시간 교통 상황은 하도 들어서 고속도로 이름과 주요 지점을 외울 지경이었다. 꽉 막힌 도로의 체증이 풀리듯 종종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단비처럼 내렸다. 가족 오락관이나 명절 특선영화처럼 유쾌한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국악 한마당이나 추석을 맞은 가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는 하품이 쩍쩍 나왔다. 심지어 중간중간 나오는 광고가 더 재미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놀 거리를 스스로 만들거나 찾게 된다.     


윷놀이판은 날짜 지난 달력을 찢어 그려야 제맛이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만만한 놀이는 단연 윷놀이와 화투다. 어느 쪽이든 온 집안이 들썩인다. 윷놀이는 단체전이라 두 팀으로 쪼개져 활활 타오른다. 게임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윷놀이판을 이색적으로 바꾼다. 놀이판 곳곳에 함정을 넣고 이 구렁텅이는 승부에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도착 딱 한 칸을 앞두고 모든 길목에 '처음으로'를 배치한다.

 “도만 피하면 돼. 개! 개! 개!”

윷을 쥔 쪽에서는 일 년을 끌어모은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다. 상대편에서는 마법사로 빙의하여 케케묵은 저주를 퍼붓는다.

 “무조건 도 나온다. 도! 도! 도!”

도개 도개 도개 도개. 두 음이 번갈아가며 점점 소리를 키울 무렵 윷이 떨어진다. 희비가 교차한다. 도다! 바로 판 위에 올려진 말을 밖으로 치워버린다. 고생 끝에 한 바퀴를 다 돌았는데 원점이라니, 야속하기만 하다.    

 

 반대로 좋은 패도 다. 특정 칸에 도달하면 말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 일명 '쌍둥이자리'다. 보통 멀리 돌아가는 길에 설치한다. 윷놀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첫 번째 모서리를 앞두고도 굳이 바깥 노선선택하는 역발상을 한다. 초반에 뒤지는 팀에서 주로 펼치는 전술인데 막판 대역전극을 노리는 과감한 결정이라 하겠다. 두 말을 얹어서 삥 둘러간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윷을 잘못 던지면 쌍둥이자리를 건너뛰게 된다. 새 말을 준비할 건지 그대로 밀고 나갈 건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토의한다. 운이 쏟아지는 순간은 도와 뒷도가 연이어 나올 때다. 두 번의 굴림으로 천국행 급행열차를 타는 기막힌 수다. 거저먹은 상황보다 더 짜릿한 만남은 앞서 가던 상대의 말을 잡는 경우다. 상대를 판 밖으로 밀어내어 출발을 늦추는 동시에 한 번 더 진군할 기회를 얻는다. 먹고 먹히는 살얼음판을 견디기 위해서 이마를 탁 치는 지략과 슬그머니 넘어가는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윷을 몰래 건드리는가 하면 바닥의 천을 당겨 결과를 뒤바꾸기도 한다. 승부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양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화투는 운과 실력이 모두 필요한 고차원 게임이다.


 화투는 제한된 인원이 치르는 개인전이라 참가자와 관람자로 역할이 나뉜다. 선수로 등판하면 좌 아빠 우 큰아버지를 코치진으로 영입한다. 승패가 빨리 나고 여러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순간 판단력과 포커페이스가 중요하다. 처음 받은 패를 꼼꼼히 분석하여 이길 수 있는 상황으로 흐름을 만든다.

 '청단을 노려볼까?'

한편으로 상대의 수를 내다보며 방어한다.

 '안돼! 고도리 비상이군.'

한 장씩 뒤집어가며 뒤따라온 패를 깔 맞춤하는 쾌감이 있다. 딱딱 맞아떨어지게 들어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행운을 얻기도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바닥이 깨끗하거나 얻은 패에 하나가 더 붙어 가져 갈 수 없는 뻑을 하기도 한다. 내가 쌓은 뻑을 상대가 가져갔을 때의 좌절감은 땅을 치게 한다.     


 화투의 점수 세계는 잔혹하다. 윷놀이는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다. 반면 화투는 시각적으로 차이가 확연하게 난다. 아슬아슬하게 이기기도 하지만 수십 점 차이로 질 수도 있다. 피박, 광박, 쓰리 고, 점수가 확확 올라간다. 밑천이 드러나면 자비 없이 쫓겨난다. 신명 나는 한 판을 즐기고 관객이 되면 중계진으로 활약한다.

 “아, 작은아버지 쌌어요! 구피라 타격이 큰데요. 거의 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죠.”

선수들의 속을 박박 긁어놓는다. 혹은 치어리더가 되어 흥을 돋운다. 과일과 땅콩, 오징어 등 주전부리를 선수들의 입에 하나씩 쏙쏙 넣어준다. 명절놀이는 스포츠 경기 못지않은 짜릿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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