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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30. 2022

여행 중 파업으로 도시에 갇히다

인도 파업의 날에는 지상 위 모든 이동수단이 사라진다



오늘내일 파업하는데 괜찮겠어요?


 바르깔라를 떠나는 아침 주인장은 걱정 어린 물음을 띄운다. 막상 가면 여차저차 해결될 거라며 당차게 이야기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찜찜해서 개운하지가 않다. 케랄라 주는 이틀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간다. 그 파장은 이방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가령 버스 노조가 동맹 휴업을 하면 시민들이 불편함을 겪지만 지하철이나 택시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대중교통이 멈춘다면 어떨까? 개인 차량이 없는 사람은 출퇴근이나 등하교를 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배달 차량이 없어 물건이 제때 들어오지 못한다. 거리 곳곳이 교통대란으로 몸살 할지도 모른다. 인도 파업의 날에는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 지상 위 모든 이동수단이 사라진다. 전국 단위로 운영하는 비행기와 열차를 제외한 케랄라 주 내부의 버스와 택시, 릭샤(삼륜차)와 배 전부가 시동을 끈다. 여행자의 발이 꽁꽁 묶이는 셈이다.


왕래가 끊긴 거리의 풍경


 하필 오늘은 이동하는 날이다. 알라뿌자(Alappuzha)까지 기차를 탈 예정인데 우선 역까지 갈 방법이 없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희망을 걸어본다. 귀가 따가울 만큼 울려대던 경적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춘다.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이 드는 생경한 풍경에 과연 이곳이 인도가 맞는지 싶다. 한참을 기다려도 바퀴가 구르지 않는다. 이러다가 못 가는 건 아닐까 초조한 찰나 고맙게도 바르깔라 숙소 주인이 친한 릭샤왈라(릭샤 운전사)를 불러준다. 좁다란 골목을 질주하면서 모퉁이에서 삡삡 주의를 주지만 반대 방향에서 오는 운전자가 없다. 듣는 이 없는 경보음이 머쓱해 점점 소리가 작아진다. 움직임이 멎은 건 교통편만이 아니다. 부산스럽던 길가는 사람 냄새마저 잃는다. 하루 만에 고립된 유령도시로 변한다. 교통체증 없이 뻥 뚫린 도로 끝에는 텅 빈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주차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어야 할 역전에 인적이 뜸하니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게 늦는 열차와 승객이 적어 여유로운 승차장


 전광판에는 지연을 알리는 문구가 뜬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차편이 거의 없다. 열차는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하루 이틀을 꼬박 달린다. 정시에 맞춰 오는 게 기적 같은 일이다. 한두 시간 늦는 건 다반사니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기다려야 속이 편하다. 그나마 평소보다 유동인구가 적어 승강장이 널널하다. 자리를 잡고 다음 여행지의 정보를 찾아보는데 갑자기 장내가 시끌벅적하다. 깃발을 든 무리가 플랫폼에서 행진을 시작한다. 앞머리에서 빨간 기폭이 흔들린다. 낯익은 무늬를 자세히 보니 낫과 망치가 대각선으로 겹쳐 있다. 낫은 농민을, 망치는 프롤레타리아를 뜻한다. 이 기호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이다. 기호 옆에 쓴 CITU라는 글자는 시위대가 인도 노동조합 소속임을 알린다. 느닷없는 집회에 얼떨떨해 역무원을 붙잡는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파업에 참여하는 운동가라 답한다. 민주주의 국가 인도에서 공산당 기를 들고 데모하는데 이게 별 일이 아니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케랄라 주의 정치적 특수성에서 비롯한다. 1957년 케랄라 주에서는 세계 최초로 공산당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정권 교체의 과정을 겪었지만 현재도 사회주의 정부가 집권할 만큼 인기가 있다. 케랄라식 공산주의는 독재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결을 나란히 한다. 케랄라 주는 문맹률이 높은 인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일 만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한다. 유아 사망률이 가장 낮고 평균 수명이 가장 길다. 카스트 간의 차별이 적고 성평등 수준이 높다. 인도 내 평균 결혼 연령이 가장 높은 점에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열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건강보험을 내실 있게 운영하고 탄탄한 복지 재정을 갖추고 있다. 그제야 시위대가 공산당 기를 들고 행진하는데도 시민들이 우호적인지 이해가 간다. 주 정부 차원에서 국가의 경제 정책에 반해 휴업을 독려하고 대중이 파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은 케랄라의 독특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공산당 기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기적이 울린다. 객실 내부는 선풍기의 날개로 열기가 채 걷히지 않아 후덥지근하다. 찜통 열차에서 당장 내리고 싶다가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한 설렘은 온데간데없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숨겨지지 않는다. 역사 밖은 휑하니 비어 있다. 알라뿌자의 상황 역시 바르깔라와 다르지 않다. 숙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살금살금 릭샤왈라가 다가온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지겹게만 느껴지던 호객행위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나는 끝장나게 운이 좋은가 보다. 신나게 짐을 끌고 프런트로 향한다. 내일 수로 유람을 하고 싶어요! 보트 회사가 파업을 했답니다. 모레 문나르 행 버스 예약 가능한가요? 여행사가 문을 닫았어요. 빨래는 어디에 맡기면 되죠? 오늘은 세탁물을 나르는 차가 없어요. 파업의 여파로 잠재해 있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오늘내일 배가 없으면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다. 꼼짝없이 이틀 동안 도시에 갇혀 버렸다.


 리셉션에 내려가 사정하니 다이얼을 돌린다. 여행사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투어를 진행하는 업체가 있단다. 다만 파업 때문에 가격이 올라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고 한다. 게다가 릭샤가 없어서 스쿠터 뒤에 타야 한다는 비보를 전한다. 가뜩이나 길도 험한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는 바이크 뒷자리에서 목숨을 걸 수는 없다. 실망감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댄다. 포기해야 하나.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를 구르다가 별안간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혹시나 해서 챙겨둔 명함을 지갑에서 꺼낸다. 코발람에서 포오바 여행을 도와준 현지 여행사 사장님의 연락처가 있다. 케랄라에 지인이 많으니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연락하라는 이야기를 믿어 보자.

- 며칠 전에 만난 코리안 걸 기억하시나요? 포오바에 갔었어요.

- 당연하죠! 여행은 즐겁게 하고 있어요?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그는 걱정 말라며 알라뿌자에 있는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동방의 베네치아, 알라뿌자의 백워터


 방을 빙그르르 돌며 핸드폰만 노려본다. 액정에 불빛이 번뜩이자 총알같이 버튼을 누른다.

- 해결했어요! 배가 많이 없긴 하네요. 그래도 제가 누굽니까? 케랄라는 꽉 잡고 있다니까요.

주인장이 월척을 물어왔다. 데스크 직원이 제시한 비용보다 저렴한데 종일 투어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아침과 점심식사가 포함되어 있고 릭샤까지 보내준다고 한다. 평소와 비교해도 그다지 비싼 금액이 아니다. 그는 포오바 유람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해 수로를 전세 내게 해 주더니 이번에도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준다. 전화통에 불이 나게 발품을 판 노력이 헛되지 않아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 양말과 속옷을 바디워시로 빨아 의자에 거는데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예상치 못한 파업으로 여행자의 몸과 마음이 무너졌지만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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