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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Apr 11. 2022

나의 일상을 관광 상품으로 전시하면 어떨까?

여행지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다


 파업 이틀째 날 번화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도로 위에는 파리만 날린다. 버스와 택시는 물론이고 릭샤(삼륜차)까지 바퀴 달린 이동수단은 모두 차고에 틀어박혀 있다. 경적이 없는 거리는 인도 다움을 잃은 듯하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릭샤와 스쿠터 한 대가 도착한다. 승객이 다섯인데 겨우 이걸로 될까? 교통편이 소멸한 시점에서 찬 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현지 여행사 사장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케랄라 제일의 관광명소를 코앞에 두고 숙소에서 입맛만 다셨을 게다. 대개 릭샤는 앞쪽에 운전석을, 뒤쪽에 이인용 좌석을 설치한다. 손님이 둘밖에 탈 수 없지만 필요는 없는 자리도 만들어 낸다. 뒷좌석에 덩치 좋은 사내 둘과 엉덩이를 반쪽씩 양보하며 세 명이 끼여 앉는다. 조수석이 따로 없다 보니 기사님은 최대한 몸을 오른쪽으로 밀착하여 승객을 옆에 앉힌다. 몸 절반이 공중에 떠 있는 앞자리 승객은 차체 모서리를 붙잡고 튕겨나가지 않도록 버틴다. 이쯤 되면 승자는 스쿠터 뒷자리를 차지한 여행자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나 후회하지만 비포장도로에서 날아오르는 걸 보니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바이크 뒷머리를 꽉 쥔 손이 빨갛게 부은 데서 긴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야자수 아래 백워터의 풍경


 야자수가 우거지고 물 냄새가 짙어진다. 운하가 가까워지나 보다.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주는 해안과 내륙의 열대림을 잇는 수로로 이름나 있다. 강과 호수, 석호를 연결하여 만든 크고 작은 물길은 과거 케랄라를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게 했다. 아랍과 중국, 로마의 상인들이 향신료와 상아를 구하러 이곳을 방문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큰 항구와 뱃길을 가진 케랄라를 식민 지배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아름다운 내륙수로 백워터(backwater)는 오늘날 뱃놀이를 즐기는 대표 관광지로 재탄생했다. 그중 900km에 달하는 운하 유람의 중심에 알라뿌자(Alappuzha)가 있다. 영어식 지명 알레피(Alleppey)로도 많이 알려진 이곳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거미줄처럼 도시 곳곳에 퍼져있는 물길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케랄라의 문화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대의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전통의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은 이방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며칠 전에 포오바(Poovar)에서 수로 여행을 했어요.

포오바는 케랄라 남부의 작은 마을이다. 알라뿌자에 비해 규모는 작다지만 운하의 풍경이 뭐 그리 다를까? 큰 기대 없이 도착한 선착장의 광경에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소박한 시골 동네 포오바를 거뜬히 삼킬 만큼 압도적인 크기다. 널찍한 백워터에는 각양각색의 배들이 부지런히 물살을 가르고 있다. 주변 도시를 오가는 관광용 크루즈와 현지인의 발이 되는 공영 페리, 작은 물길을 헤치는 나룻배와 그물을 손질하는 고기잡이배가 운하를 가로지른다. 그중 단연 이목을 끄는 것은 물 위를 떠다니는 호텔이다. 하우스 보트(House Boats)는 식민 지배 시절 영국인이 즐겨 타던 호화선이다. 나무와 코코넛, 캐슈너트 껍질로 만든 쌀 수송선 껫뚜발람(kettuvallam)을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침실과 욕실, 부엌과 테라스 등 여느 호텔 부럽지 않은 시설을 가지고 있고 매끼 주방장이 요리한 따뜻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내가 탈 배는 웅장한 하우스 보트는 아니지만 케랄라 고유의 목재 카누다. 사공이 직접 기다란 장대로 강바닥을 밀고 노를 젓는다. 덩치 큰 선박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물길을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호화로운 하우스 보트와 아담한 카누


 선체가 좌우로 크게 출렁인다. 주변의 거대한 여객선이 만든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쳐 물방울이 튄다. 수면과 비슷한 높이의 나룻배는 물살이 잔잔해지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벌써 몇 채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월요일 출근길의 혼잡한 도로 상황 못지않다. 운하에 신호등이라도 달아야 할까? 물결 위에 선을 긋고 교통정리를 해야 할 지경이다. 심지어 오늘은 파업으로 평소보다 이동량이 적은 편이다. 사실 목적이 다른 배가 섞여 있으니 속도가 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시민이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페리는 빠르게, 수로 유람이 목적인 관광용 선박은 느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거북이 행렬에서 벗어나려면 작은 물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백워터 깊숙이 들어가자 물살이 잔잔해지고 기슭을 따라 높게 쌓인 단이 나타난다. 배를 댈 수 있도록 중간중간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담 위로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민가와 햇볕을 막는 그늘막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마을 어귀에 다다랐나 보다.


 초대받은 가정의 마당이 꽤 널찍하다. 안주인은 능숙하게 인원수를 헤아리더니 식사를 준비한다. 푸른 유리접시의 테두리에는 길쭉한 야자나무 이파리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납작한 안쪽 면에 야채 커리를 붓고 가장자리에 이들리 세 개를 얹는다. 이들리는 우리나라의 밥과 같다. 쌀가루를 반죽한 후 쪄서 만드는데 찰기가 적고 구멍이 숭숭 뚫린 술떡과 식감이 비슷하다. 전형적인 남인도의 아침상이라 하겠다. 이들리를 카레에 찍어 접시를 싹싹 닦아내면 뜨뜻하게 배가 불러온다. 미소가 싱그러운 주인집 소녀는 호기심이 많다. 손을 잡아끌더니 물가로 데려간다. 카약과 양동이, 포대로 어지러운 강변에서 빨간 자전거를 찾아낸다. 한 뼘만 더 자라면 딱 맞을 크기다. 타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는지 세운 상태에서 손잡이만 이리저리 돌린다. 방향을 트는 대로 앞바퀴가 움직이니 신기한가 보다. 뒷 안장을 잡아 가르쳐주고 싶지만 길 폭이 좁아 위험할 듯하다. 그러고 보면 이 동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살갑게 대한다. 매일 같이 수백이 넘는 외지인이 드나드니 익숙한 걸까?


술떡을 닮은 이들리는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뒷마당은 꼬마들의 놀이터다. 공사를 하다 만 건지 제멋대로 쌓인 돌 틈에서 주인집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돌멩이를 부딪쳐 깨뜨리기도 바가지에 물을 담았다가 바닥에 쏟기도 한다. 주변에 눈에 띄는 재료는 무엇이든 장난감이 될 수 있다.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개구지게 노는 아이들 뒤로 알록달록한 빨래가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얇고 통풍이 잘 되는 천을 사용해서 습도가 높은 환경에서도 금방 마른다. 바람이 불자 야자나무 이파리와 원색의 옷감이 춤을 춘다. 한가한 전원의 풍경에 발걸음이 느려진다. 언뜻언뜻 빨랫감 사이로 연둣빛 들판이 보인다. 낮은 담벼락 너머에 너른 논이 펼쳐져 있다. 벼의 키가 잘은 게 모내기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운하 뒤편에 비밀스러운 풍경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물길이 좁고 강변을 따라 빽빽하게 가정집이 붙어 있어서 구태여 찾아보지 않으면 수로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아채기 어렵다.


좁은 운하 뒤에는 기름진 평야가 숨어 있다.


 강렬한 정오의 태양이 물길을 비춘다. 나룻배의 낮은 천막 아래로 몸을 숙인다. 선미에서 성실하게 노를 젓는 사공 아이니에게는 그늘이 없다. 사시사철 더운 케랄라에서 긴팔 셔츠와 치마 모양의 룽기를 입는 까닭을 알겠다. 더위보다 따가운 햇빛을 견디기가 더 어렵다. 눈이 부실 것 같아 챙 넓은 밀짚모자를 건넨다. 마음에 드는지 깊게 눌러쓴다. 좁은 운하를 파고들수록 물빛이 점차 탁해진다. 촘촘하게 들어선 민가와 그보다 많은 사람이 수로를 공유하니 당연한 일이다. 선체에 하나둘 부딪히던 부레옥잠이 어느덧 수면 전체를 뒤덮는다. 물살이 잔잔해도 사공이 노를 젓기에 더 힘든 환경이다. 아이니는 자리를 앞으로 옮겨 부레옥잠 점령 지대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나무와 진흙, 수염뿌리와 동그란 잎자루가 만든 작은 섬은 우리를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앞서가던 사공이 기다란 장대로 길을 터준다. 물길에서는 조용히 떠다니는 부레옥잠 늪을 조심해야 한다.


사공 아이니와 펄럭거리는 모자의 챙이 퍽 잘 어울린다.


 케랄라인에게 수로는 어떤 의미일까? 크고 작은 일거리를 모두 물길에서 해결하는 걸 보면 운하가 없는 풍경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강변에 걸터앉은 노인은 실 바늘에 미끼를 꿰고 얄따란 나무 낚싯대를 던져 고기를 낚는다. 옆자리 아낙은 펄떡이는 생선을 바닥에 놓고 칼질을 한다. 새댁은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흠뻑 머금은 옷가지를 두드리며 빨래를 한다. 목만 빼고 동동 떠 있는 엄마는 아이 겨드랑이에 튜브를 끼우고 목욕을 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외지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대다수는 익숙한 상황인 듯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여행지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다. 매일같이 외부인이 찾아오면 분명 불편할 테다. 하지만 관광업에서 비롯된 수입이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생계수단이니 막을 수도 없다. 특히 케랄라의 운하는 다른 유명 관광지와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방문객은 수로뿐만 아니라 현지인의 일상을 궁금해한다. 자신의 사적 영역이 관광 상품으로 전시되는데 유쾌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길 여행의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다. 다만 일과 생활의 경계가 흐릿한 곳을 방문할 때 여행자로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지 더 세심하게 살피겠다고 다짐한다.


물길은 케랄라인에게 오랜 삶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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