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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Aug 06. 2022

여행의 맛을 다시 알아버렸다

현금도 카드도 못 쓴다고요?


우리 너무 많이 준비하는 거 같아. 어차피 가면 다 바뀔 거야.


 여행을 떠나기 두 달 전 어영부영 미루다 꽤 비싼 가격에 표를 끊었다. 여행책자를 살피며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일정을 바꾸길 여러 차례, 친구가 지쳐 나가떨어진다. 아니 그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린 무계획러에 가까운데 말이지. 1일 차 스노클링, 2일 차 등산 이렇게 뭉텅이로 짜면 듬성듬성 스케줄을 세우는 거 아닌가? 그간의 여행 스타일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전체 기간만 잡고 숙소든 루트든 확정 짓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가서 좋으면 오래 있고 아니면 옮기는 식으로 여행해왔으니 교통편과 숙박을 미리 알아보는 방식은 사전 답사를 철저히 하는 셈이다.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 ‘에라 모르겠다, 가서 하자’며 예약 창을 닫아버렸다.


비 온 뒤 신비로운 자줏빛의 하늘과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Petronas Twin Tower)


 친구의 예언은 첫날부터 현실이 되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스톱오버를 하는데 둘 다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다. 현지 화폐는 무엇이고 시내까지 나가는데 어떤 방법이 좋은지 알 리가 없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그때부터 검색을 시작한다. 우선 환전을 할지 말 지부터 정해야 한다.

- 달러가 별로 없으니까 카드로 긁자.

시내까지는 그랩(Grab, 차량 공유 서비스)으로 이동하고 식당에서는 카드로 결제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의 야경을 본다는 단출한 목표를 이루고 저녁식사까지 맛있게 하고 난 뒤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온 쿠알라룸푸르 여행이 꽤나 성공적인 듯 보였다. 딱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분수쇼를 보고 백화점의 무료 와이파이로 그랩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다.


 백화점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셔터를 내린다. 식당과 카페는 출입구 근처에 없고 가까운 명품샵은 영업이 끝났다며 팔로 엑스자를 긋는다. 바깥은 우기답게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은 캐리어에 고이 모셔 놓았다. 이 와중에 환전소는 일찌감치 파장을 했다. 사실 가지고 온 달러도 없다. 정문으로 그랩과 택시가 줄지어 밀려들어온다. 와이파이가 안 되니 그랩은 못쓰고 현금이 없으니 택시도 탈 수 없다.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족히 한 시간은 가야 하는데 곤란한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 둘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 생각이 없다. ‘큰일 났다’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에 가깝다. 답이 없어 보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까닭이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 남미, 인도 등 온갖 험지를 다닌 여행자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경우를 무수히 겪어왔다. 거기다가 여기는 서울 못지않게 번화한 쿠알라룸푸르다. 해결방법이 없을 리 없다.


 나의 묘안은 약간의 뻔뻔함과 부끄러움이다.

- 제가 유심이 없는데 와이파이가 안 돼서요. 혹시 핫스팟 좀 켜주실 수 있으세요?

그렇다. 길거리에서 친절해 보이는 현지인을 부여잡고 낯 뜨거운 말을 내뱉는 사람이 바로 나다. 당황한 기색도 잠시, 데이터가 터진다. 땡큐 땡큐! 그랩을 부르고 핫스팟의 주인을 배웅한다.

- 너 진짜 대박이다.

친구가 빵 터진다. 인도에서 택시 기사와 릭샤왈라의 번호를 따면서 한층 얼굴이 두꺼워졌기에 망설임은 사치다. 15분쯤 지났을까, 차가 많다지만 안 와도 너무 안 온다. 혹시 우리를 못 찾는 게 아닐까? 와이파이 빌리기 2차전에 돌입한다. 겨우 닿은 기사님에게 위치를 설명하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상냥하게도 핫스팟의 주인이 전화기를 건네받아 우리를 돕는다. 탑승 위치를 잘못 찍어서 돌아오고 있단다. 무사히 숙소행 택시에 오르고서야 우리가 꽤나 무모했다는 걸 인정한다.  


서퍼들의 천국, 꾸따 비치


 발리에 도착한 후 우리의 여정은 쿠알라룸푸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치 클럽이 좋다던데 어때요?

- 사흘 전에 새로 생긴 곳이 있어요. 거기가 최고예요!

택시 기사님과 숙소 직원의 추천이 일치하자 바로 계획을 수정한다. 아직 구글 지도에 나오지도 않는 새로운 장소로 간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달까. 앞으로의 여행이 지금처럼 우당탕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리라는 걸.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힌 지 어언 삼 년. 그동안 국내 이곳저곳을 쏘다니기는 했지만 그간 내가 해온 방식과는 색깔이 달랐다. 좋은 호텔을 찾고 차를 렌트하고 맛집을 검색하면서 몸은 편하고 가성비는 좋은 여행을 만들려 애썼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건사고로 인한 분노, 길거리에 나앉았다가 기적적으로 극복하면서 얻는 안도감, 다양한 배경의 사람과의 교감이야말로 내가 여행에서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그제야 스스로를 통제하려던 무의식이 풀어지고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이 온몸을 감싼다.

- 어디로 가?

- 일단 나가자. 가다 보면 괜찮은 데 있겠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여행의 맛을 다시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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