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년 랜드 국립공원
'이런 잠꾸러기 두 남자들'
여기까지 와서 잠이 중요한가?
메사 아치에서 일출을 보자니 일단 거절부터 하고 본다.
그래서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우리가 또 언제 캐년랜드에 다시 와서 일출을 본다고."
그 말이면 남편은 대체로 오케이다.
이제는 아들 차례.
“생일이니까 일출 보면 좋지 않겠어?”
“그래, 일찍 일어나면 생일을 오래 즐길 수 있지. 생일에 일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생일은 중2병도 낫게 하나보다.
나는 모압에서 하고 싶은 게 딱 두 가지 있었다.
메사 아치에서 일출보기, 델리키트 아치에서 일몰보기였다.
어찌보면 해에 집착하는 것 같다. 해가 그냥 넘어갔다가 다시 뜨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하늘이 특별히 다채로울 뿐이다.
일몰에는 쨍쨍 내리쬐는 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핑크빛과 붉은 빛 노을과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온 세상이 깜깜해 지는 것 뿐이고 일출에는 캄캄했던 하늘이 일몰의 역순으로 밝아지는 것을 볼 뿐이다.
마흔이 되니 중고등학생 때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오글거리는 의미부여는 더이상 하지 않는다.
새벽 4시 50분.
알람이 쩌렁쩌렁 울렸지만 아무도 깨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전날 일몰을 보고 숙소에 9시에 도착했는데 밤 10시까지 수영을 했고, 몸이 운동상태에서 쉼으로 넘어가는데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1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메사아치까지는 50킬로미터가 조금 넘어서 서둘러야 했다. 8월 말, 그날 일출 시간은 6시 42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해돋이만 보고 다시 숙소에 들어갈 생각으로 옷만 대충 걸쳐 입었다. 오가는 데두 시간 정도걸리고 그날은 캐년랜드를 둘러보기로 해서 숙소에 들어가면 두 번 왕복을 해야 하지만 하루치 준비를 다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눈꼽만 떼고 물과 쿠키만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캄캄했다.
가로등도 없는 도로에는 차의 진동과 엔진소리, 전조등 불빛만 보였다.
반달보다 조금 컸던 달도 붉은 캐니언을 뒤로 넘어갔다. 달이 없는 하늘에는 시리우스 자리와 다른 별들이 달빛을 대신했다. 가끔 우리 차를 지나가는 차의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은 진짜였다.
기온은 19도. 긴 팔셔츠에 긴 바지를 입었는데도 서늘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했던 6시 10분쯤에 하늘이 어슴푸레 회색빛이 돌았다. 다행히 메사아치는 아치까지 10분만 걸으면 된다. 만약 델리케이트 아치처럼 40분을 걸여야했다면 더 새벽같이 일어나 달빛도 없는 길을 걸어야 했겠지.
세상에는 늘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언제 온 건지 아치 앞 명당에는 삼각대를 놓고 바위에 기대 있는 사람들로 다 차 있었고 명당이 아닌 곳만 남아있었다.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는지 곁에 빈 라면컵이 있었다. ‘아, 배고프다’ 이제 기다림만 남았다.
여기서 명당은 땅과 아치 사이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자리다. 메사 아치는 나지막해서 아치 앞에서 몸을 낮추고 봐야 그 틈 사이로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명당자리가 아닌 덕분에 메사 아치 뒤로 낮게 펼쳐진 캐년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서도 메사 아치 앞에 우뚝 서 있는 바위 위에서도 아치와 뜨는 해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해에 산란되어 장밋빛으로 변해가는 구름덕에 저기서 해가 뜨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아”
해가 떠오르자 모두 감탄을 내뱉었다.
평지인 펜실베니아 집에서 아파트 위로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볼 때마다 신기한데 여기서도 역시. 산에서 해가 나오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행 끝무렵이라 피곤이 누적돼서 그럴지도.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한 시간을 잤다.
숙소로 돌아오지 않고 이어서 국립공원을 둘러봤다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만 쌩쌩했다.
잠도 자고 아침도 먹었더니 좀 살만해져서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시 50분을 운전해서 캐년 랜드로 갔다.
옐로스톤이나 그랜드캐니언처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에는 제너럴 스토어나 랏지에서 음식을 팔지만 아처스 국립공원이나 캐니언랜드 국립공원에는 음식을 파는 곳이 없다. 귀찮아도 도시락을 싸서 아이스박스에 넣어 다니는 게 좋다.
도착하자마자 메사아치를 올랐다.
호텔 키를 메사 아치에 떨어뜨린 것 같으니 다시 가서 찾아보려고 간 것도 맞지만 사실은 남편이 해가 완전히 떴을 때 한 번 더 캐년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해가 뜨니 새로운 곳에 온 느낌이었다. 아침에는 환웅이라도 내려올 것 같은 신성한 느낌이었다면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또렸해서 여기가 어떻게 형성된 지형인지 알아내야겠다는 느낌이랄까.
메사 아치를 내려가서 편도 1 마일 그랜드 뷰 포인트도 둘러보고 저녁에는 아들 생일 기념으로 터키음식도 먹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천둥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우리가 일출을 본 날을 제외하고 3일 동안 이틀이나
저녁에 비가 내렸다. 전날 일출을 봐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솔크레이크 시티에 가서 하루 자고 필라델피아행 비행기를 타면 여행도 끝이다.
서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