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식혜 <산딸기 크림봉봉>

그림책 에세이 1

by 니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의 실제나이보다 자각하는 나이를 어리게 생각한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아서 아직도 내가 철부지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다가 ‘내가 어른이라고!’ 놀라게 되는 때가 있다. 구정이 코앞에 다가와 양가 부모님들에게 용돈을 얼마나 드려야 할지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 고민할 때, 그때는 정말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실감한다. 빳빳한 새 돈을 은행에서 찾아와 봉투에 넣으며 새삼 놀란다. ‘돈을 벌어서 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니!’하고. 어릴 때는 세뱃돈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노는 것이 명절이었는데, 이제는 양가에 드릴 선물을 고르고 음식을 장만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든 철없는 아들, 딸은 세뱃돈을 받고 기뻐한다. 그게 엄마, 아빠의 빚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할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셔서 이제 명절이 되어도 만나기 힘들어진 고모, 삼촌들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다. “아들이 고등학생이라고? 내 눈엔 네가 아직 아기인데.” 아들이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고 하니 고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다섯 살까지 증조할머니, 할머니, 당시에 아직 학생이었던 고모와 삼촌들까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고모랑 삼촌들은 내가 태어나서 기어 다니고 걷고 뛰는 모습을 봤으니 아직 내가 어리게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여든이 넘었던 증조할머니, 아직 팔팔한 오십 대였던 할머니, 거기에 직장인이었던 아빠, 학생이었던 고모와 삼촌들까지 온 연령대가 함께 살았던 그 집구석구석을 아직 기억하는 걸 보면 내가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보냈구나 싶다.


유년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좋아하는 명절 디저트는 식혜다. 다른 집에서는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식혜를 ‘감주’라고 불렀다. 명절이 다가오면 집은 정말이지 잔치 분위기였다. 기억에 남는 건 방앗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이 배달 오고, 삼촌들은 차례상에 올릴 밤을 깎던 장면이다. 할아버지는 붓으로 병풍과 상에 올릴 글을 쓰고, 향을 피우고, 엄마는 작은할아버지네 며느리들과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했다. 할머니는 명절 전부터 정성 들여 식혜를 만들었다.


식혜 티백도 없고, 보온 밥솥도 없었던 그 시절 할머니의 식혜 만들기는 방앗간 방문으로 시작됐다. 할머니는 방앗간에서 엿기름을 사 와 절구에 찧고 미지근한 물에 넣고 조물조물 주물러 전분을 우려낸 후 체나 베보자기에 걸러 뿌연 물만 받아낸 후에 앙금을 가라앉히고 맑은 물만 조심히 따라냈다. 보온 밥솥이 없었기 때문에 보온 밥솥의 역할은 온돌 아랫목이 대신했다. 밥에 엿기름 물을 부어 아랫목에 밤새 두면 식혜가 익는데, 할머니는 이 과정에서 실패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증조할머니는 호랑이처럼 무서워서 매 과정마다 할머니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며 엄청나게 간섭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나한테는 잘해주셨어. 할머니가 고생했지.”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엄마는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더러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시어머니와 함께 시동생들을 줄줄이 데리고 살라고 하면 그렇게 속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할머니는 잘 익은 식혜를 연탄불 위에 놓인 들통에 부어서 설탕을 넣고 끓인 다음 마당에 두고 식혔다. 아직도 살얼음이 낀 식혜를 기억할 수 있다. 겨울의 한가운데, 밤새 마당에 둔 차갑고 달콤한 식혜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나중에 전기밥통이 나온 후에 엄마는 밥통 보온 기능으로 식혜를 만들었다. 가정용 보온밥통은 커봐야 10인용. 식혜가 맛있다며 오며 가며 마시는 손주들을 먹이느라 엄마는 식혜를 한 번 만들어 식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시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총 두 번을 만들어야 했다. 다 만든 식혜는 마당이 아니라 김치냉장고로 들어갔다. 이제는 마당이 있는 주택이 아니라 아파트에 살기 때문이다. 베란다는 창문을 조금 열어둬도 마당만큼 시원하진 않다. 추억에 미화돼서인지 내 미각이 변한 건지 이상하게도 요즘 식혜는 어린 시절 식혜맛이 나지 않는다.


이 년 전 미국살이에 챙겼던 건 식혜 팩이었다. 아이들의 미국 친구들이 놀러 오면 식혜를 만들어서 대접해야지. 했던 마음이 챙겼다. 한국에서 한두 번 실습도 해보고 자신이 붙어서 챙겨갔다. 내가 식혜를 직접 만들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식혜 팩이 있으니 얼마나 쉽던지. 그냥 식혜팩과 밥 한 공기와 물을 밥솥 보온 기능으로 두고 자고 일어나서 밥솥을 열면 밥풀이 한두 개 동동 떠오른 것이 보이는데 그때 식혜를 냄비에 넣고 설탕과 함께 끓여 차갑게 식히면 완성이었다.

이젠 명절에 시가에서도 친정에서도 식혜를 만들지 않는다. 두 어머니들도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식혜를 만드는 것도 힘이 부치시는 것 같다. 그래도 마트에서 식혜를 사두시긴 하시니 손주들의 식혜 사랑을 막을 순 없나 보다.


식혜를 마시며 《산딸기 크림봉봉》을 떠올렸다. 에밀리 젠킨스가 글을 쓰고 소피 블래콜이 그린 《산딸기 크림봉봉》은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영국의 라임이라는 마을로 간다. 300년 전 엄마와 딸은 산딸기를 따고 직접 우유를 짜고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거품기로 우유 크림을 만들어 산딸기 크림봉봉을 만든다. 다 만든 산딸기 크림봉봉은 우리 할머니가 식혜를 마당에 둔 것처럼 언덕배기 얼음창고에 넣어둔다. 차가운 산딸기 크림봉봉을 아빠와 오빠는 식탁에서 엄마와 딸은 부엌에서 양푼에 남은 걸 핥아먹는 장면은 그 시절 여성들의 삶을 말해준다. 200년 전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인 엄마와 딸이 금속 거품기를 써서 산딸기 크림봉봉을 만든다. 주인집 가족들은 식탁에서, 산딸기 크림봉봉을 만든 흑인 엄마와 딸은 벽장에 숨어서 양푼에 남은 걸 긁어먹는다. 100년 전 미국의 여느 가정에서는 배달된 우유와 얼음으로 만든 산딸기 크림봉봉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다. 지금은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서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 전동 믹서기의 버튼 하나로 산딸기 크림을 뚝딱 만들어 낸다. 같은 디저트지만 노동의 결은 점점 옅어진다. 팔이 저리도록 저어야 했던 시간이, 이제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

300년의 시절이 내가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만들었던 식혜와 지금 식혜 팩으로 식혜를 만들기까지의 시간으로 압축된 것 같았다. 1980년대 할머니의 부엌을 떠올리면 따뜻하다. 하지만 느긋한 단란함은 엄마와 작은할머니네 며느리들, 할머니의 긴 노동 위에 세워져 있었다. 풍성함 뒤에는 오래 서 있어야 했던 여성들의 등이 있었다.


《산딸기 크림봉봉》도 여성이 상이 둘러앉지 못했던 시절, 노예가 존재했던 과거를 그대로 그려낸다. 300년 전 노예제가 있었던 당시 나뭇가지 거품기를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노예였던 엄마와 아이가 벽장에서 숨어 먹던 산딸기 크림봉봉은 이제 누구라도 먹을 수 있는 디저트가 되었다. 요즘 한국 명절 준비도 마찬가지다. 철없이 음식을 주워 먹기만 바빴던 철부지 나는 이제 엄마와 할머니의 노동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것이 간소화되었다. 음식 준비는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끝난다. 친정도, 시가도 차례가 사라졌고, 전도 부치지 않는다. ‘잘 먹고사는 세상이니까 명절에는 그냥 좋은 곳을 놀러 다니자.’하고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다. 노동이 줄어든 자리에 비로소 ‘함께 있음’이 들어왔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고 가족끼리 차를 타고 바다로 산으로 관광지로 놀러 간다. 그것이 어른이 된 내가 누리는 변화다. 명절에 먹는 마트표 식혜는 비록 수고스럽게 만든 입에 딱 맞는 식혜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그 식혜의 달콤함은 노동이 줄어든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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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 크림봉봉》 2016년 7월

에밀리 젠킨스 글, 소피 블랙올 그림, 길상효 옮김 / 씨드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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