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린지,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9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시며, 말 못할 고통과 외로움 속에 계셨을 어머니를 떠올리면,
마음이 으깨지는 듯하다.
아들이라고, 잘 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 가끔 집에 들리는 것만 해도 고마워하셨던 어머니의 얼굴,
야윈 그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어머니의 빈자리에, 상실감과 우울감 속에,
헛헛한 마음에, 모든 것이 서운하고 슬펐다.
특히 주변사람들에 대한 마음.
그런데 어느 누군가 나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꼭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연이나 예술도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고, 무엇인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왜 나는 항상 사람으로 채우려 했는가. 그닥 사람이랑 가까이 하진 않음에도, 항시 외로웠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엉킨 실타래가 살포시 풀린 느낌이 들었다.
다시 문학과 음악 그리고 자연과 친해져야겠단 생각이 든다.
한참 외로운 시기를 겪었던 20대 후반에도, 내 깊은 벗이 되어주던 것은 클래식이었지.
그땐 복잡한 선율과 감정선을 보이는 쇼팽을 특히 좋아했었다.
음악을 잘 모르는터라, 그저 무식하게 들으며, 선율에 내 감정들을 덧씌웠던 기억.
특별히 쇼팽의 삶이 기구했던터라, 더 감정이입하며, 여러 연주가들의 공연 영상을 보며,
말 못할 답답함을 흘려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제 30대 초중반을 향해 가는 이 시기엔,
모짜르트나 바흐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복잡한 감정과 기복을 이끌어 내려 기교 넘치는 건반 터치와 섬세한 선율이 묻어나는 곡보단,
이젠 리드미컬하며 수학적이고 규칙적인 곡이 좋다.
세상의 그 어떤 번민도 아픔도 슬픔도,
자연의 음계로 승화시킨 듯한 느낌이랄까.
인간의 복잡함은 골치아픔이라면, 자연의 복잡함은 조화라고나 할까.
모짜르트나 바흐는 그 자연의 복잡함을 포착하여 건반에 녹여 놓은 것 같다.
특별히 바흐의 골든베르그를 듣고 있자면,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 설원벌판에,
나 홀로 고요히 서있는 듯한 느낌. 춥지만, 오직 내 호흡과 심장소리만 들려,
그간 잊고 있었던 내 안의 깊은 생명력이 티없이 맑은 자연과 따듯한 조우를 하며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건반과 건반 사이를 씩씩하게 오가는 선율은, 내 안의 낀 세속의 녹을 벗겨내는 자연의 활기찬 손길로,
규칙적이고 조화로운 음계로 화음을 빚어낼 땐,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위로 받지 못 해 갈 곳 잃은 내 마음이 가야할 방향을 넌지시 보여주는 듯하다.
갑갑한 유학생활에, 든든한 친구가 생겨서 너무나도 좋다.
언젠가는 자연과도 깊은 친교를 이루겠지. 당분간은 우선 낯선 음악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